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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zedAuthor

2026 BEVERAGE #253

By EDITOR'S LETTER

카뮈의 〈전락〉은 암스테르담의 술집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클라망스는 그곳에서 매일 밤 낯선 이에게 자기 고백을 늘어놓는다.
과거엔 잘나가던 파리의 변호사였다고. 그런데 어느 날 밤 센강 다리에서 여자가 뛰어내리는 소리를 들었고, 멈추지 않았다고.
그 이후로 그는 법정 대신 술집을 택했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편집장 자리에 막 앉은 직후였다.
멈추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때는 몰랐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조금 안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먼저 던져지고, 그다음 스스로를 만든다.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무엇을 만들었나.
〈데이즈드〉.
텍스트, 그래픽, 스토리텔링, 이미지. 마감. 또 마감. 인간을 선명하게 기록하는 일.
그 사르트르가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최초의 인간이라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스스로 제도화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덜 알려진 뒷얘기가 있다.
사르트르는 상금을 포기하는 게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신념도 신념이지만, 가난했다.
실존주의자도 돈은 아쉽다. 나는 이 대목이 제일 좋다. 위대한 철학자의 가장 인간적인 순간.
클라망스는 타락한 뒤에야 자신이 누구였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나는 예상보다 오래 한우물을 달렸다. 그게 더 무서운 버전일 수도 있다.

로런츠 하트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다.
〈뉴욕타임스〉의 한 평론가는 썼다. “하트의 발라드 가사는 자신이 사랑받기엔 너무 못생겼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심장을 멈추게 하는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는 키가 150cm를 조금 넘었고, 평생 자신을 혐오했다. 게이였고, 1940년대 뉴욕에서 그건 불법이었다.
그는 호모 섹슈얼리티에 대한 영구적 죄책감 속에 살았고, 사랑에 대한 가사를 수백 곡 썼지만
성숙하고 대등한 관계를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의 가사들, “My Funny Valentine”,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 “Blue Moon.” 한 전기작가는 썼다.
하트의 가사는 파티에서 배제된 사람의 이야기라고.
문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는 느낌. 자신이 보잘것없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느낌.
그 감정들이 전부 노래가 됐다. 천재의 자기혐오가 세기의 스탠더드로 살아남았다.
그의 오랜 파트너 리처드 로저스가 〈오클라호마!〉 개막 파티를 연 그 밤, 하트는 다른 바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8개월 뒤, 그는 자신이 즐겨 찾던 맨해튼 8번가의 바 앞 인도에 쓰러진 채 발견됐다.
폐렴으로 4일 뒤 죽었다. 48세였다. 클라망스는 술집에서 고백했다. 하트는 술집 앞 길바닥에서 끝났다.
둘 다 멈추지 않은 사람들이다. 다만 하트는 멈추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자 농구의 전설 위성우는 14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 8회, 통산 340승을 쌓고 스스로 코트를 떠났다.
그가 말했다. 기회를 주지 못한 선수들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고.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고.
클라망스가 다리 위에서 멈추지 않은 것처럼, 하트가 술잔을 내려놓지 못한 것처럼, 위성우는 그 선수들에게 손을 내밀지 못한 기억을 안고 산다.
위대한 사람의 죄책감은 이런 모양이다. 트로피가 아니라 얼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다. 위성우의 버전은 다르다. 타인은 내가 못 갚은 빚이다.
랭보는 19세에 시를 그만뒀다. 카뮈는 노벨상 상금으로 프로방스에 집을 사고,
기차 대신 친구 차를 탄 날 죽었다. 아무 예고 없이.
하트는 〈오클라호마!〉 개막 8개월 후 48세에 죽었다.
그 밤 사르디스 바에서 마지막 고백을 쏟아낸 뒤.

〈페스트〉의 의사 리외는 묻는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도시에서 왜 계속 일하느냐고.
답이 없다. 그냥 의사니까. 그냥 여기 있으니까.
나도 그렇다. 왜 18년째 마감을 하느냐. 그냥 편집장이니까. 그냥 여기 있으니까.
스포츠와 위스키는 이 질문을 잠시 유예시킨다. 경기가 시작되면 생각이 멈춘다.
잔을 따르면 판단이 부드러워진다. 이게 쾌락이 아니라 자유인 이유다. 의미를 잠깐 내려놓는 자유.
클라망스는 매일 밤 술집에서 고백했다. 하트는 마지막 밤을 바에서 보냈다.
사르트르는 상금을 포기하며 씁쓸해했다. 나는 가끔 경기를 보며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는다.
다 살아 있는 방식이다. 각자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윤리는 순리 안에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신다.

이호명
李浩銘
Homéon Lee

 

202605 #252

By EDITOR'S LETTER

 〈데이즈드〉 코리아, 〈데이즈드〉 대한민국의 18년은 역발상의 여정이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곳을 찾아가는 기개 넘치는 탐험이었다.

혈혈단신으로 런던의 〈데이즈드〉 UK 오피스에 찾아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을 때
고작 100만원 남짓 갖고 기존 팀원들과 〈데이즈드〉를 계속하자며 의기투합했을 때
가로등 불빛조차 없던 성수동 연무장길 1로 사옥을 이전했을 때
그 구두 공장을 사무실로 바꿀 비용이 부족해 찜질방 인테리어 전문 사장님을 졸라 건물 수리를 의뢰했을 때
코로나19가 발발해 사람과의 접촉을 꺼리던 시기에 필름 프로덕션 레이블을 론칭했을 때
10년 전부터 VFX 디자이너를 연이어 채용하며 렌더링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직함 대신 내 이름을 불러달라며 모든 팀원의 이름을 닉네임으로 부르기 시작했을 때
‘게이즈드’라는 별명이 뿌듯하다며 LGBTQ+를 향한 각종 콘텐츠와 이벤트를 거침없이 진행했을 때

안 된다고 했을 때
아니라고 했을 때
희한하다고 했을 때
도망가라고 했을 때
에디터 사관학교라고 했을 때

나는, 우리는, 〈데이즈드〉는 이것을 꾸준히 새겼다.
잡지사가 아니다.
잡지가 아니다.
기자‘님’이 아니다.

〈데이즈드〉에 단 1분이라도 머물렀던 모든 이에게,
〈데이즈드〉를 지지해 준 모든 이에게, 

고맙다.
부족하다.
미안하다.

열여덟 살의 〈데이즈드〉는 그래서 한없이 울고 있다.
어리다고,
기다려달라고.

이번 생일에도 커버에 자축의 말은 없다.
그럴 만한 자격이 생기는 날까지,

〈데이즈드〉,
모순과 충돌,
역발상.

 

이호명
李浩銘
Homéon Lee

 

듣는 VS 보는

By DEKOPOP

양지은 양지은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다.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출판사인 프레스룸PRESS ROOM을 운영하고 있으며, 시각 아이덴티티, 홍보물, 인쇄 매체, 디지털 또는 물리적 공간을 디자인한다. 현재 디자인 방법론을 강의하며 실무와 담론 사이의 균형을 모색 중이다.

K-팝에서 시각디자인은 음악을 담는 예쁜 그릇을 만든다기보다 음악의 형태를 결정하는 설계에 가깝다. 우리에게 음악은 그 어느 때보다 일상적이고 가깝게 닿아 있지만 동시에 휘발적이다. 형체 없는 신호로서의 음악을 현실 공간 점유를 유도하는 물리적 경험으로 고착시키는 것, 그것이 현재 K-팝 시각 디자인의 본질적 역할이다.

하나의 앨범 디자인은 크게 로고와 그래픽 모티프, 타이포그래피와 같은 시각 체계를 수립하는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이를 반영한 패키지, 책, 에페메라Ephemera 같은 ‘인쇄 매체’로 입체적 구성을 이룬다. 이는 아티스트의 음악이라는 비정형의 신호를 시각 시스템으로 번역하고, 손에 잡히는 물성으로 치환하는 고도의 설계 과정이다. 전자가 음악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추상적인 정신이라면, 후자는 그 정체성을 팬들의 일상으로 침투시키는 구체적인 육체가 된다. 결국 K-팝에서 앨범 패키지는 단순한 부속품이 아니다. 음악이라는 추상적인 신호를 시각과 촉각적 경험으로 수신하게 만드는 가장 물리적인 인터페이스인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디지털 시대에 ‘보는 경험’이 이토록 집요하게 물성으로 확장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화면 너머로 닿지 못하는 결핍을 선명한 실재감으로 채워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질 수 없는 것을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다. 팬들에게 피지컬 앨범은 아티스트의 세계관이 가상 세계의 파편이 아닌 내가 발을 딛고 선 현실 공간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확신을 준다. 앨범의 묵직한 무게감, 특수 인쇄된 종이의 낯선 질감, 패키지를 열 때 발생하는 비닐과 종이의 ‘바스락’ 소리는 디지털 미디어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감각의 아카이브다. 이 물리적 접촉을 통해 아티스트의 메시지는 팬의 개인적 공간인 책상 위, 선반 한구석으로 깊숙이 침투하며 강력한 정서적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엔터테인먼트사 역시 이러한 작동 원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피지컬 앨범 기획에서 어떤 형태와 콘셉트로 구성품을 선정할 것인지가 늘 치열한 고민거리가 되는 이유는, 이 물성이 팬덤에게 제공하는 정서적 지지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앨범 패키지를 품에 안았을 때 느껴지는 부피감은 리스너에게 아티스트와 동시대를 공유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선사한다. 이러한 감각적 전이는 K-팝을 듣는 것을 넘어 경험하는 것으로 격상시킨다. 그리고 이런 정서적 지지력을 구축하기 위한 시각적 설계는 실제 제작 현장에서 집요한 디테일의 구현으로 구체화된다.

이 경험의 설계는 매 순간 물리적인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작년 10월 발매된 르세라핌의 첫 번째 싱글 앨범 〈SPAGHETTI〉 프로젝트는 4월 중순에 시작해 9월 말에야 디자인이 마무리됐다. 평균적으로 앨범 디자인은 기획부터 제작 발주까지 약 3개월이 소요되고, 최근 1.5개월 수준으로 압축된 시장의 속도를 감안하면 〈SPAGHETTI〉는 고심해 기획하고 디자인의 밀도를 여러 차례 점검할 시간이 주어진 긍정적인 케이스로 볼 수 있다.

당시 르세라핌의 피지컬 앨범은 상자형 3종, 포토 북형 6종을 비롯해 플랫폼형과 상품형까지 총 10여 종이 넘는 라인업으로 구성되었다. 이 방대한 구성물은 단순히 양적 풍요를 위함이 아니다. 팬들이 앨범을 언박싱하는 찰나마다 아티스트의 메시지를 다각도로 목격하게 하려는 시각 디자인의 전략적 배치인 셈이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쏘스뮤직의 비주얼 크리에이티브팀과 우리가 가장 고민했던 지점은 ‘스파게티’라는 대상과 음악의 콘셉트를 어떻게 직관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였다. 이를 위해 프레스룸에서는 스파게티 면의 형태적 특징을 반영해 국문과 영문 레터형 로고를 디자인하고, 상자형 패키지에 실제 스파게티 패키지가 가진 전형적인 구조를 입히는 과정을 거쳤다. 시중에 유통되는 브랜드별 패키지 디자인을 살핀 후 길쭉한 상자형 규격을 정하고, 실제 상품 표기 형식을 빌려 세부 정보 원고를 기획했다. 상자를 두르는 선에 금박 처리를 해 패키지의 전형성을 강조하는 등 세부 요소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특히 실제 상품 패키지에서 내부에 담긴 내용물이 밖에서도 보일 수 있게 유통되는 전형성을 차용하는 것은 이번 프로젝트의 리얼리티를 완성하는 결정적 장치라고 판단했다. 스파게티 면 그래픽이 인쇄된 속상자와 이 그래픽이 노출되도록 바깥 상자에 아티스트 로고 형태로 타공Die-cut을 설계했고, 같은 맥락에서 식품 패키지에 동봉된 실리카겔의 물성을 빌려 포토 카드를 포장하는 방향도 제안했다. 이는 초기 단계에는 제작 계획에 없던 공정이었으나 콘셉트의 완결성을 향한 디자이너의 의지에 소속사가 적극적으로 화답하며 결과물의 밀도를 한층 끌어올리는 시너지를 발휘했다. 단순히 구성품을 담는 용도였던 속상자는 전면이 스파게티 면으로 인쇄된 단독 오브제로 재설계되었고, 포토 카드를 담는 봉합형 특수 봉투도 추가로 제작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이 버전의 포토북 은 상품 패키지에 동봉된 레시피 북 콘셉트로, 상자 규격에 맞춰 세로로 길쭉한 판형의 노란색 스프링 제본을 채택했다. 일반적인 감상 경험을 고려했다면 안정적인 A판형이나 B판형을 선택했겠지만, 포토 카드를 실리카겔로 대치한 맥락에서 제책 조건 또한 시각화 목표에 부합하는 방향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기로 했다. 다만 바깥 상자에서 시작된 반복적인 차용 경험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북 디자인은 오직 타이포그래피 시스템과 레이아웃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제목은 클래식한 세리프 서체를, 본문은 가독성 높은 고딕 서체를 사용해 정갈한 요리책의 권위를 부여하고, 각 곡의 가사는 단락별로 ‘STEP 1, 2, 3…’로 구성해 요리책이라는 주제의 완결성을 높였다. 팬들이 가사를 읽는 행위가 아티스트가 제안하는 요리를 함께 만드는 유희적 경험으로 전환되길 바랐다.

이처럼 촘촘히 설계된 시각 체계는 단지 앨범이라는 인쇄 매체에 머물지 않고, 영상과 오프라인 공간으로 뻗어나가며 그 세계관을 증폭시킨다. 시각화의 방법론이 고정된 평면에서 동적인 영상으로, 다시 입체적인 공간으로 무한히 변주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작동 원리는 디지털 콘텐츠와 물성 사이의 감각적 동기화다. 〈SPAGHETTI〉 앨범의 버전 중 플랫폼형(Weverse Albums ver.)은 소속사가 희망한 ‘시즈닝 상품’이라는 콘셉트를 실무적으로 구체화한 대표적 사례다. 우리는 유통 규격의 제약을 준수할 수 있는 시즈닝 팩의 유형을 고민한 끝에 다채로운 향신료 라인업을 연상시키는 패키지를 완성했다. 특히 순한 맛과 강한 맛으로 구분된 두 패키지의 성격에 맞춰, 동봉되는 포토 카드의 수량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향신료 목록을 제안해 서사적 개연성을 높였다.

소속사는 앨범을 소개하는 영상에서 각 버전마다 수립된 시각적 모티프를 중추적 연출로 확장했다. 영상에서는 이 시즈닝 패키지가 공중에서 요리에 가루를 뿌리는 듯한 모션으로 연출되었는데, 이는 팬들로 하여금 곧 손에 쥐게 될 물리적 실체에 대한 기대감을 시각적으로 미리 맛보게 하는 장치가 되었다.

이러한 확장성은 음반 매장이라는 오프라인 접점에서도 이어진다. 과거의 앨범 진열이 단순히 아티스트의 얼굴을 노출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앨범의 콘셉트와 물성을 이용해 공간 자체를 큐레이션한다. 〈SPAGHETTI〉 앨범의 경우, 실제 마트의 진열 방식을 차용하거나 길쭉한 상자형 물성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거대한 조형물을 만드는 등 매장 자체를 하나의 콘셉트 스토어로 변모시켰다. 팬들은 음반 매장에서 실제 식품 매대와 같은 진열을 목격하고, 집으로 돌아와 상자를 열어 레시피 북을 탐독하고 영상에서 본 시즈닝 패키지의 물성을 직접 손에 쥐어본다. 이 일련의 시각적 연쇄 경험은 리스너를 단순 감상의 영역에서 완전한 몰입의 영역으로 이끈다.

K-팝 비주얼의 진화 과정에서 ‘재현’이 리스너의 시각적 경험을 자극하고 확장하는 유희적 장치로 기능했다면, 최근 목격되는 미학적 흐름은 그래픽 디자인의 근원적인 방법론으로 회귀해 음악이 내포한 형이상학적 개념을 은유적으로 시각화하는 고전적 정공법에 가깝다. 이는 화려한 장식적 기교나 직관적인 사물묘사에 의존하는 대신, 비례와 서체, 그리고 기호가 이루는 엄격한 질서만으로 개념이 지닌 고유한 오라Aura를 구축해내는 작업이다.

디자인 스튜디오 뮤온Muon이 전개한 엔터테인먼트사 Rii.MJ의 아이덴티티는 이러한 설계 철학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들은 레이블이 추구하는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구상적인 이미지를 차용하는 손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 )와 [ ]라는 기호적 은유를 통해 레이블의 시스템 그 자체를 시각화했다.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는 유연한 입력값으로서의 소괄호와 그 입력된 개념이 결과물로 도출되는 구조적 범위를 뜻하는 대괄호를 축으로 삼음으로써 아티스트의 이념이 콘텐츠에 따라 어떻게 변용되고 확립되는지를 그래픽디자인 문법을 통해 설득한다. 이는 디자인을 단순히 시각적인 외피로서 감상하게 만들기보다 견고한 체계에 내재된 논리성을 읽고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접근이다. 타이포그래피의 미세한 비례와 기하학적 질서만으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이 방식은 시각적 과잉의 시대에 오히려 그래픽디자인의 본질이 지닌 정제미를 자아낸다. 동시에 이는 시각디자인이 표면적 장식을 수행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는 선언이자, 무형의 개념을 하나의 음악으로 축조해 내는 음반 제작의 메커니즘과 본질적으로 닿아 있음을 함축한다.

알파드라이브원의 첫 번째 미니앨범 〈EUPHORIA〉의 로고 디자인 역시 근원적 문법의 은유가 도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지점을 증명한다. 디자인은 ‘환희’라는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 상투적인 이미지를 빌려오기보다 방향성Vector과 연결Connection이라는 물리적 로직을 설계의 기틀로 삼았다. 중심점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화살표들은 유포리아라는 감정이 가진 확산과 팽창의 에너지를 시각적으로 치환하고, 이 벡터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얽히며 형성하는 성좌의 구조는 파편화된 음악적 영감들이 하나의 단단한 세계관으로 응축되는 과정을 정교하게 은유한다. 결과적으로 이는 화려한 색채나 가공된 장식 없이도 선의 굵기와 방향, 점의 배치라는 그래픽디자인의 기초적 질서만으로 음악이 지닌 정서를 장악해 낸 탁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제 K-팝 분야의 시각디자인은 음악을 보조하는 수단을 넘어 아티스트와 앨범이 지향하는 세계관의 농도를 전달하는 결정적 인터페이스로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변화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현장이 디자인의 중요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이를 음악적 메시지와 동등한 층위의 주요 자산으로 대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산업적 인식은 물리적 재현과 개념적 은유라는 두 방법론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끊임없이 진화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력이 되고 있으며, 이는 동시대 디자인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재현을 통한 감각적 확장과 은유를 통한 개념적 사유는 결국 음악을 단순 감상의 영역에서 총체적 몰입의 영역으로 전이시킨다. 시각디자인이 사운드를 물리적 현전으로 번역해 내는 순간, 음악은 비로소 우리의 일상을 점유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으로 완성된다. 기술과 미학이 결합해 만들어낼 새로운 시각적 변주들이 K-팝의 또 다른 영토를 개척해 나가길 기대한다. 이러한 행보는 음악이 멈춘 뒤에도 오랫동안 듣는 이의 감각 속에 공감각적 기억으로 잔류하는 영속적 시간이 될 것이다.

읊어봐, 엔하이픈이라고

By FASHION, NEWS
〈데이즈드〉의 열여덟 번째 생일. 그 18년의 기록 어딘가엔 언제나 K-팝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데뷔의 첫 순간부터 함께한 〈데이즈드〉가 진심으로 애정해 온 엔하이픈. 이들의 성장이 곧 〈데이즈드〉의 성장이었다. 이제 명실상부 K-팝의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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