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전락〉은 암스테르담의 술집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클라망스는 그곳에서 매일 밤 낯선 이에게 자기 고백을 늘어놓는다.
과거엔 잘나가던 파리의 변호사였다고. 그런데 어느 날 밤 센강 다리에서 여자가 뛰어내리는 소리를 들었고, 멈추지 않았다고.
그 이후로 그는 법정 대신 술집을 택했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편집장 자리에 막 앉은 직후였다.
멈추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때는 몰랐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조금 안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먼저 던져지고, 그다음 스스로를 만든다.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무엇을 만들었나.
〈데이즈드〉.
텍스트, 그래픽, 스토리텔링, 이미지. 마감. 또 마감. 인간을 선명하게 기록하는 일.
그 사르트르가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최초의 인간이라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스스로 제도화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덜 알려진 뒷얘기가 있다.
사르트르는 상금을 포기하는 게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신념도 신념이지만, 가난했다.
실존주의자도 돈은 아쉽다. 나는 이 대목이 제일 좋다. 위대한 철학자의 가장 인간적인 순간.
클라망스는 타락한 뒤에야 자신이 누구였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나는 예상보다 오래 한우물을 달렸다. 그게 더 무서운 버전일 수도 있다.

로런츠 하트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다.
〈뉴욕타임스〉의 한 평론가는 썼다. “하트의 발라드 가사는 자신이 사랑받기엔 너무 못생겼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심장을 멈추게 하는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는 키가 150cm를 조금 넘었고, 평생 자신을 혐오했다. 게이였고, 1940년대 뉴욕에서 그건 불법이었다.
그는 호모 섹슈얼리티에 대한 영구적 죄책감 속에 살았고, 사랑에 대한 가사를 수백 곡 썼지만
성숙하고 대등한 관계를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의 가사들, “My Funny Valentine”,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 “Blue Moon.” 한 전기작가는 썼다.
하트의 가사는 파티에서 배제된 사람의 이야기라고.
문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는 느낌. 자신이 보잘것없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느낌.
그 감정들이 전부 노래가 됐다. 천재의 자기혐오가 세기의 스탠더드로 살아남았다.
그의 오랜 파트너 리처드 로저스가 〈오클라호마!〉 개막 파티를 연 그 밤, 하트는 다른 바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8개월 뒤, 그는 자신이 즐겨 찾던 맨해튼 8번가의 바 앞 인도에 쓰러진 채 발견됐다.
폐렴으로 4일 뒤 죽었다. 48세였다. 클라망스는 술집에서 고백했다. 하트는 술집 앞 길바닥에서 끝났다.
둘 다 멈추지 않은 사람들이다. 다만 하트는 멈추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자 농구의 전설 위성우는 14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 8회, 통산 340승을 쌓고 스스로 코트를 떠났다.
그가 말했다. 기회를 주지 못한 선수들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고.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고.
클라망스가 다리 위에서 멈추지 않은 것처럼, 하트가 술잔을 내려놓지 못한 것처럼, 위성우는 그 선수들에게 손을 내밀지 못한 기억을 안고 산다.
위대한 사람의 죄책감은 이런 모양이다. 트로피가 아니라 얼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다. 위성우의 버전은 다르다. 타인은 내가 못 갚은 빚이다.
랭보는 19세에 시를 그만뒀다. 카뮈는 노벨상 상금으로 프로방스에 집을 사고,
기차 대신 친구 차를 탄 날 죽었다. 아무 예고 없이.
하트는 〈오클라호마!〉 개막 8개월 후 48세에 죽었다.
그 밤 사르디스 바에서 마지막 고백을 쏟아낸 뒤.

〈페스트〉의 의사 리외는 묻는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도시에서 왜 계속 일하느냐고.
답이 없다. 그냥 의사니까. 그냥 여기 있으니까.
나도 그렇다. 왜 18년째 마감을 하느냐. 그냥 편집장이니까. 그냥 여기 있으니까.
스포츠와 위스키는 이 질문을 잠시 유예시킨다. 경기가 시작되면 생각이 멈춘다.
잔을 따르면 판단이 부드러워진다. 이게 쾌락이 아니라 자유인 이유다. 의미를 잠깐 내려놓는 자유.
클라망스는 매일 밤 술집에서 고백했다. 하트는 마지막 밤을 바에서 보냈다.
사르트르는 상금을 포기하며 씁쓸해했다. 나는 가끔 경기를 보며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는다.
다 살아 있는 방식이다. 각자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윤리는 순리 안에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신다.

이호명
李浩銘
Homéo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