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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202303 #195

By EDITOR'S LETTER

매달 원고 마감이 늦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고질병이다.
써야 할 양이 절대적으로 많든 적든, 촬영이 많든 적든, 출장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딱 그만큼 마감이 늦는다.
그쯤 되면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척추를 늘어뜨린 채 가만히 앉아서 생각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어떤 습관은 천성과 같아서 누가 누구를, 무언가가 또 무언가를 달라지게 하거나 나아지게 할 순 없어.
행동은 세상을 인식하는 태도. 행동이 습관이 되는 건 반복 때문이야. 반복을 통해 얻은 나쁜 습관을 못 고치는 건 따지고 보면
마음이 그걸 좋아하기 때문이지. 다시 좋은 습관을 지니려면 또한 고통스러운 반복이 필요한데, 천장 보고 누워 있고 싶은 본능과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싶은 마음은 마감보다 우주보다 힘이 강하니까. 이런 식의 자기 위안에 빠져 있다 보면 환멸을 못 이겨 폭식하거나 구토하고 말 것 같다. 두 가지 반응 다 그다지 세련되지 않은 구식이라는 걸 알지만, 동시에 인간은 완전하지 않고 죄 또한 많다는 괜한 동정심이 깃든다.
용서만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다는 하나 마나 한 속 편한 소리나 죽음으로 씻지 못할 죄는 없다는 성인의 말씀?
어휴, 됐다 그래. 다 필요 없어. 꺼져. 지겨워.

그토록 날카로운 날, 살갗에 닿는 바람이 한결 온화해진 이후 창밖을 자주 보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밤에. 매일 보는 풍경이어도 매번 달랐다. 어둠의 깊이와 밀도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가 되었고, 나무는 대체로 어떤 사물로, 드물긴 하지만
가끔은 온전한 나무로 보였다. 뜨거운 샤워 후 촉촉한 감촉을 느끼면서 새까만 밤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웬일인지 신경이 부드럽게 풀린다.
한낮의 격한 울분, 두통, 경멸은 흐릿해지고 때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분노를 직면해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이성 대신 그런 품위 없고 어리석은 감정이야말로 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답 없는 낙관의 기분마저 든다.
쉬이 잠들지 못한 채 밤에 깨어 있는 시간은 늘었지만 술은 덜 마시게 되었고, 정기적으로 불쑥 치밀어 오르는 절망적인 기분의 시간도
차츰 줄어들었다. 입춘이 지난 며칠 전 밤은 유난히 어두웠다. 창밖의 은행나무 군락은 평소와 다르게 싸늘하고 냉정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밤의 부드러움에 취해 곁에서 서성대기만 하다가, 그러다가 밤이 곧 끝나버리고 말겠군.

푸른 밤에는 주로 영화를 본다. 혼자서. 일본 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감독 중 가장 좋아하는 이는 단연 데라야마 슈지다.
그가 1971년에 만든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는 잔뜩 선동적인 제목을 붙인 허무주의에 심취한 철부지 아나키스트의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매번 통렬하다. 먼발치에서 세상을 향해 훈수 두는 것이 아니라 살갗에 바로 닿을 듯이 붙어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주목한다. 영화가 끝나갈 즈음 주인공 소년이 성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듯이 카메라를 향해 퍼부어대는 대목에서
쨍한 마음과 태도가 된다. 콜라병에 갇힌 도마뱀!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를 보고 나선 밤. 종로3가 맥도날드 앞에 혼자 홑겹 우비를 입고 서 있는데 와우, 기분 참 야하더라.
비는 억척스러웠고, 살아야겠다는 몸부림과 사라지는 세계가 짬뽕이 되어 질척이는 우주가 약 먹은 것처럼 두둥실.

 

최지웅
Choi Jiwoong

202302 #194

By EDITOR'S LETTER

봄날은 온다

내게는 쉰두 살 먹은 사진가 친구가 있다. 눈이 펄펄 내린 날,
그가 사는 서래마을 대저택에 눌러앉아 늦도록 트러플 새우깡에 펩시 제로를 마셨다.
그가 날 이렇게 바라보더니 그랬다. “넌 기복이 없어서 좋아. 배배 꼬인 게 없잖아.
네 엄마, 아빠가 널 아주 많이 사랑해서 그럴 거야. 사랑받고 자란 애는 달라. 티가 나.” 어렴풋이 웃고 말았다.
어린 시절 내 얼굴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탓은 아닐는지. 망각은 참으로 편리해. 

이달 인터뷰한 <애프터썬>의 샬럿 웰스 감독이 샹탈 아커만이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그가 죽기 전에 만든 영화 <저기>를 생각했다. 
이 질식할 듯한 롱테이크가 작렬하는 영화는 오직 블라인드가 드리운 텔아비브 어느 아파트의 바깥과 안의 풍경만으로 이뤄져 있다.
영화의 끝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저 멀리 거울에 비친, 그러나 어떤 초점도 없이 나타나는 거무튀튀한 형체로서의 인물,
샹탈 아커만을 보게 된다. 영화를 보며 이 영화가 몇 개의 샷으로 이뤄져 있는지 셈을 하려다 포기해 버렸다.
서른? 아니면 마흔? 아마 그 어느 즈음일까. 모르겠다. 우리는 오직 샹탈 아커만의 얼굴 없는 목소리만을 듣는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자란 그는 단지히에서 이스라엘로 넘어가려다 일자리와 안전이 보장된 브뤼셀로 이주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지중해의 그 도시로 향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자살을 선택한 고모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반유대주의에 관한 책을 읽고 히브리어를 떠올리며 하염없는 무력감을 고백하고,
집 근처에서 벌어진 살인 테러에 관해 말한다. 이 영화는 어떤 초점도 없는 디지털 캠코더로 대상을 기록한다.
초점 없는 흐릿한 눈길. 관객은 블라인드를 통해 비친 평평하고 밋밋한 화면의 어떤 귀퉁이에서
차를 마시거나 화초에 물을 주거나 하는 인물을 찾아보고 잠시 그곳에 시선을 집중한다.
이 초점 없는 화면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영화를 보며 나는 내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졸음과의 혈투를 벌이며 답을 찾으려 했다. 모르겠다. 

아무튼 우울증이라는 구덩이에 빠진 젊은 아빠와 어린 딸의 짧은 여름휴가를 캠코더로 간직한 <애프터썬>의 햇빛과 뒷모습, 
어떤 디졸브는 마치 거울을 보듯 민망하고 아파서 눈물조차 나질 않았다. 
나 역시 “Don’t trust over thirties” 어쩌구 하며 서른을 넘기 전에 사라질 것처럼 공언하던 때가 있었다.
자살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서른 뒤의 삶은 기생일 뿐이라는, 그래서 죽음과 진배없는 삶일 것이라는
자기 자신을 향한 몹쓸 저주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서른도 그 끝자락에 와 있다.
맙소사, 그런데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으며 삶을 돋울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접지 않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내게 아이가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고, 원통해진다.
난 아마 그 아이를 키우며 제 삶을 키웠을 것이다. 늙은 자들은 그렇게 삶을 연명하는 것 같다.
그토록 몇 년간 아이를 기르고 싶어 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바쁘다는 말로는 부족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 쓰라는 원고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어영부영 취해 소파에 누워 
<일타 스캔들>과 <대행사>를 필두로 한 밀린 드라마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때,
5년 전 일기가 적힌 새벽 문자 한 통을 받고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다가 냉장고 속 청하를 탄산수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5년 전 일기는 아래와 같다. 
“집으로 가는 취한 택시에서 무턱대고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태원 영이네에 마주 앉아 꼬막을 주워 먹었다.
잠깐이었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제대로 된 이별을 고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친 건 그의 고통을 마주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머지않아 심하게 망가져 주저앉을 것이다. 그리고 단단하겠지. 나는 그날만을 기다린다.”

이어진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5년 전 형의 예언인데 형이 보기에 지금 나 어때? 심하게 망가진 것 같아?
내가 보니까 망가진 것 같기도 한데, 망가진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 형은 알 것 같아서.
나는 요즘 화가 많이 나는데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어. 가슴이 막 갑갑하네. 아무튼 그래. 
따뜻한 봄 되면 밥 먹자. 지금 말고.”

내 예언은 단 한 번도 들어맞은 적이 없으니까. 
감정이 달라지는 건 당혹스럽지만, 그 마음만은 정직하다. 어떤 것에 대한 애정은 갑자기 피어나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2월 어느 날, 이제 겨울은 완전히 끝났다고 느끼는 것처럼. 그게 뭐라고 좋은 마음을 먹는다. 

 

최지웅
Choi Jiwoong

202302 #193

By EDITOR'S LETTER

 

자신이 편집증적인 집착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면 어떤 대처를 할 수 있을까.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아수라장이라는 것을 매일 아침 목격하던 순간,
그런 발견과 자각은 분명 자신이 고집스럽게 발견하려고 했던 그 무엇을 향한 편집증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어떤 경우에도 일이 나를 압도하거나 잠식하거나 집어삼켜 버리지 못할 거란 확신도 자존감도 있지만,
가끔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뿌옇고 어두운 불안감이 닥쳐온다.
일하기 좋은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지만 어차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상식적으로 당연하거나 중요하다고 통용되는 일 중에는 놀랍도록
불투명한 모순과 혐오가 더 많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거나 몸으로 경험할 때.
그런 생각들이 겹치면 우연히 불행해진다. 우울한 마음이야 어떻든 상관없지만 불행한 감정은 싫으니까,
화가 나니까 나름의 방법을 찾는다.
매번 우왕좌왕하며 실패해 버려서 문제지. 

중요한 건 마음인데 마음은 늘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마음은 어제보다 오늘 ‘요만큼’이라도 더 잘하고 싶다.
하지만 방법을 몰라서 기분이 어두워질 땐 좋아하는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진다.
아끼는 영화를 돌려 보고 좋아하는 사진집을 열어 보고 머리맡에 뒹구는 책을 쥐고 읽는 둥 마는 둥 한다.
쿰쿰한 책 냄새를 맡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과 마음을 조율하고 다잡기 전에 술 한잔하는 건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샴페인이나 와인은 좀 질렸고, 차라리 샘물 같은 청하는 어떨지. 
다만 이 경우, 한 잔만 마셔도 산송장의 몰골로 만취해 버리거나 아무리 퍼마셔도 정신이 또렷하다는 기묘한 부작용이 있다. 

베냐민은 과거는 자신을 구원함으로써 완전해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럴싸해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 다시 보니 그의 말은 어딘지 의아하고 엉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그 말이 어느 정도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쩌면 미래로서의 과거를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과거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봉쇄되어 버린 미래, 그런 미래로서의 과거 말이다.
그 미래를 소생시키기 위해 우리는 다시 또 과거로 가야만 한다.
거기에 잠자고 있는 미래를 흔들어 깨워 일으켜 세우는 일이야말로 
과거를 소중히 기억하는 일이다. 그래야 기억은 역사가 된다. 

낮과 밤이 뒤바뀐 마감 기간, 해가 다 뜬 아침에 겨우 눈을 붙이려고 침대 속에서 펼친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생각하는 자에게 하나는 둘로 쪼개진다.” 잠결에 받아 적은 내용이라 정확하지는 않다. 핑계는 만들 요량이면 얼마든지 있다는 듯. 

+

일요일이 그리 싫다던 샤넬은 오랫동안 살아온 파리 리츠 호텔에서 일요일에 죽었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가 숭배하던 
흰 꽃을 바쳤지만, 오직 루키노 비스콘티만이 새빨간 꽃을 놓고 갔다. 내일, 아니 오늘은 일요일. 

 

최지웅
Choi Jiwoong

202301 #192

By EDITOR'S LETTER

호텔에 홀로 머물 때면 무던히 대하던 형이상학에도 집착해. 갖다 붙인 말이 어렵지, 그냥 원인 모를 초자연적 현상에 사로잡힐 때가 있잖아.
호텔은 명목상 쉼을 위한 공간인 거 알지? 
그런데 온갖 군상이 오며 가며 남기는 것이 쌓이고 쌓이면 말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거든. 
가령 내가 나체로 32층 창문에 붙어 춤을 추든, 욕조에 앉아 시뻘건 와인을 마시다 정수리 위에 쏟아붓든,
침대 위에 서서 레이즈 감자칩을 뜯다가 몽땅 쏟아 버리든, 
뭘 해도 그만일 용기가 마구 샘솟거든. 

하루는 어떤 친근함보다 그런 낯섦? 아니 날 선 기분에 사로잡힐 땐 어김없이 호텔로 향해. 
파크 하얏트에 체크인했더니, 방에 이리도 거울이 많았나.
침대 위와 앞, 소파 뒤, 한 바퀴 뺑 돌아 욕실 안은 물론이고, 바로 욕실 문 옆에 또? 맞니? 옷장을 열면 하나 더, 마지막으로 여긴 
화장실용 방이 따로 있어? 그 문 앞, 하다 하다 토토 변기 앞까지? 열댓 평 남짓한 방에서 
이 모든 전신 거울을 다 어디다 쓰라고, 대체 얼마나 용모를 단정히 해야만 하는 건지.
거울에 반사된 온몸의 근육들, 표정 하나까지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니 이제껏 본 적 없던 내 모습은 마치 리얼리티나 다름없구나.
거울 속 너와 나 사이, 실오라기 하나 없이, 숨을 곳도 못 찾고, 빛을 아무리 따라가도 그냥 나밖에 없거든.
이 방에서 누가 지냈든, 지금 누가 들어오든, 눈앞에 존재하는 건 나뿐이로다.

그러니까 최고 시설의 안락함으로 집 같은 편안함을 제공한다는 호텔, 그 완벽한 껍데기 안에서 알맹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한 것과 같은 상황인 거지. 자발적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방 안 오갈 데 없이 마주한 자아란 진짜배기거든. 그러니 지금부터 말하는 건 허공을 향한 외침이자,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 거다.

긍정과 긍정 그리고 긍정
부정의 부정의 부정

내 마음대로 이상향에서 긍정은 나열해야 마땅하고, 부정은 종속 또는 인과관계여야만 성립한다네.
즉 긍정은 이유 없이 반복해도 건설적인 효과를 낳고, 부정은 당위성이 존재할 때만 귀를 기울여야 할 터.
차라리 이중부정은 다시 긍정으로 우회하니 한층 높은 단계의 긍정이로다.
이 원리를 좇아 거울 앞에서 나는 다시 중얼거릴 따름이네. 긍정과 긍정 그리고 긍정. 부정의 부정의 부정. 
어쩌면 이게 초긍정, 이게 형이상학 주문이라면서. 

2023년 흑묘년을 맞아 내걸 만한 약속도, 희망도, 소원도 없지만, 단 하나, 이것만은 명심할 수 있다네.
좋고, 싫음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소신 있는 발언에 책임까지 질 수 있다면,
이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류애라고 자신 있게 말하겠다.
스스로가 진정 좋고 싫음이 뭔지 깨달을 때 자아에 한층 가까이 접근할 수 있으니까.
호오好惡를 말할 줄 알고, 또 연습하게 만듦으로써 우리가 사회에 다시 이바지하라고,
그러니까 파크 하얏트가 사방팔방 거울을 그리 냅뒀나 보구나. 

 

오유라
Oh Yura

202212 #191

By EDITOR'S LETTER

11월 16일 오전 11시 13분, 오늘도 마감이다. 
피에르 잔레가 조지 나카시마에게 의뢰한 1950년대 빈티지 의자를 기어코 
마감 한복판에 보겠다며 출근길에 또 샜지. 

의자를 보았고, 앉아보았고, 만져보았고, 또 안아보았지.
탐욕인가 싶었는데, 진심이었지. 
가격은 1만8000달러, 약 2300만원대. 
꼭 쌍으로 사야 소장 가치가 더 커진다는 회유에 자꾸만 귀를 쫑긋거리는데.
기함할 만한 화폐가치에도, 아 그 나뭇결을 만져보지 않고선 말할 수 없다네.
거뭇한 손때와 나이테가 느껴지는 목재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단다. 
근래 느껴본 적 없는 궁극의 촉감을 선사한다고.

그래 지랄도, 지랄이지, 하다가.

천금의 옷과 가방은 그렇게도 사재기하면서….

요즘 틈만 나면 하는 기행은 빈티지 가구 감상이다. 특히 그 의자가 요상해. 
의자는 가구 중에서도 실용성으로 볼 때 으뜸인 동시에 권위와 권력의 상징과 같다고 한다.
예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하지 않던가. 
수많은 왕좌와 옥좌를 뒷받침하던 그 의자들이 지금은 대중화를 거쳐 또 다른 의미와 미적가치를 짊어지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난다.
무의식적으로 새 의자를 보면 엉덩이부터 들이대고 보는 내가 낯설기도 하다니까. 
요즘 들어 어떤 권력에 맛들인 건 아닌지 자조하기도 하거든. 

12월을 코앞에 두고, 사내에서 챙길 애들이 족히 서른 명쯤 되는데, 
이것들이 나이를 또 먹는다고 툴툴거리니 지레 겁부터 난다. 
내년 계획을 차근히 살펴보다 자세를 고쳐 앉고, 엉덩이를 들썩거려보기도 하고, 
또 자조하고, 그러니까 권력이 이렇게 생겨? 이렇게 사람을 만들어?

 

오유라
Oh Yura 

202211 #190

By EDITOR'S LETTER

그땐 몰랐는데 지금은 안다. 어린 시절 아침마다 괴로워하며 눈을 뜰 때마다 불과 어제의 나는 싹 다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 태어나기를 바랐다.
살금살금 겨우 눈을 떠봤자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일 뿐 무슨 별난 짓을 해도 영영 그대로인 걸 어린 나이치고 빨리 받아들인 편이다. 

종종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열네 살에 폼 잡고 쓴 싸이월드 다이어리를 인스타그램에 실수로 공유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딱 그런 표정이라는 걸 새삼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도 이만큼,
고약한 고리대금업자인 양 다짜고짜 멱살 잡고 비난하는 영화도 한 트럭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극장에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고 스크린으로 광선 같은 빛이 마구 쏟아져 내릴 때,
모르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가보지 않은 세계의 무수한 삶과 죽음을 마주한 다음 털고 일어나 각자 갈 길을 갈 땐 그러면 안 되는데,
외롭지 않았다. 대체로 그때뿐이긴 했지만 내가 썩 괜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듯 혼자 극장에 가고 혼자 극장에 가고 혼자 극장에 가고 극장에 갔다.
영화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어두운 극장으로의 도피 그 자체를 좋아하는 건지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냥 살고 있다. 

기형도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종로3가 어귀, 낙원상가 꼭대기에 서울아트시네마라는 이름의 극장이 있었다.
종로의 뒷골목은 알 수 없는 어느 곳에서 몰려든 이들로 온종일 부산하거나 특유의 야릇한 기운이 넘실거리는데
악기 상가의 계단을 차곡차곡 올라 극장에 도착하면 지상의 소란은 온데간데없고 늘 제법 한적했다.
나는 아마 불안하고 근심 어린 낯빛으로 혹은 적잖이 상기된 표정과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극장 앞을 서성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 가운데 누군가는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이를 난생처음 마주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칸과 오스카를 휩쓴 저 유명한 감독들이 인사동이 내려다보이는 옥상 끝에서 담배를 피우며 시시덕거릴 땐
담배도 피울 줄 모르는 주제에 괜히 곁에 머물며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곤 했다. 지금 알고 있는 영화들, 사랑하고 들춰 보는 영화들,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지만 세포 구석구석 어딘가에 무의식으로 남아 있을 이름들을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그 낡은 극장에서 다 배웠다.
이게 뭐 하자는 이야기인가 눈을 부릅뜨고 스크린을 째려보다가 최면에 걸린 듯 깊은 렘수면에 이르는 순간이 잦았지만
눈만 감았을 뿐 다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을 마감한 장뤼크 고다르는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장뤼크 고다르의 죽음은 촬영되었을까? 호기심을 품는 것만으로 부도덕한 경범죄를 저지른 기분이 되지만, 
그가 조력 자살을 선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맨 먼저 떠올린 것은 그 마지막 무대의 연출이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최후조차
하나의 이미지를 남기는 ‘연출’을 시도했을지 모른다는 불순한 생각을 품고 있다. 

나는 가와세 나오미의 팬이다. 한파가 닥친 어느 해 겨울, 난방도 잘되지 않아 냉장고처럼 차가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그 이름을 처음 알았다.
그는 너무 일찍 부모와 헤어졌다. 바람난 아버지는 떠나버렸고, 어머니도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났다.
외할머니는 남겨진 외손녀를 자신의 딸로 입양했다. 다 자랄 때까지 그는 늘 혼자였다. 각종 혼자 놀기를 섭렵한 다음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8mm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스무 살이 좀 넘었을 때 카메라 하나 덜렁 들고 불현듯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그 기록은 <따뜻한 포옹>이라는 제목으로 남았는데, 그야말로 엉성하고 유치한 구석이 차고 넘치는 영화다. 가와세 나오미는 개의치 않는다.
애초에 평론가니 관객이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쥔 가와세 나오미는 혼잣말을 하기 시작한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나는 왜 늘 슬픈 거지?”

부산엘 다녀왔다. 다시 돌아온 영화제의 여전하지만 좀 낯선 풍경을 낮은 포복으로 움직여 다녔다.
좋은 영화와 좋은 대화가 오간 날인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기분이 바닥이다. 며칠째 같은 꿈을 꾼다. 검고 탁한 물속으로 줄곧 자맥질한다.
기를 쓰고 덤벼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 어느 날 꿈속에 나는 닿을 것이다. 닿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다시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평생을 따라다닌 우울과 두통도 끝날 것이다. 아닌가. 아님 말고. 

 

최지웅
Choi Jiwoong

202210 #189

By EDITOR'S LETTER

살다 보면 믿어지지 않는 장면 속에 멍때리고 서 있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긴 시간 울며불며 사랑하다 차라리 죽어라 하고 저주하며 힘들게 헤어졌는데, 어느 날 둘이 자주 가던 극장 로비에서 딱 마주친 순간.
너무 남 같을 때. 과연 한때 연인이긴 했나 싶다. 시간이 더 흘러 이 세상에 더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땐
거품 물고 까무러치기라도 했던가.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잠시 생각한 다음 먹던 밥이나 마저 다 먹었다. 
사랑은 그토록 지나치게 잔인하고 흔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이하고 귀하다. 우리 사랑은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진 환상처럼.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에겐 쩨쩨한 헛소리로 들리겠지만. 

유튜브를 틀어놓고 잠드는 습관은 또 어디서 배워먹은 건지. 목구멍이 칼칼해 써야 할 원고를 미루고 불안한 잠을 택한 지난 밤,
잠든 기색이 있다면 알아서 좀 닥칠 것이지 꿋꿋하게 제 갈 길 가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용한 점쟁이처럼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Sunday Morning’을 들려줄 때 한 많은 귀신인 듯 몽유병 환자처럼 깨어나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다 들었다.
그러곤 다시 누웠다. 새삼스럽게. 비로소 그 노래와 루 리드를 왜 그토록 긴 시간 좋아한 건지 좀 알 것도 같다.
매춘부, 남창, 건달, 기둥서방, 깡패, 좀도둑, 양아치, 약쟁이, 거지, 드래그 퀸과 그 외 각종 잡다한 군상에 관한 그의 노래, 
아니 그의 시는 무엇보다 야릇한 감정으로 어떤 기시감 같은 걸 던진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지만 언젠가 내가 살았던 듯한 세상인 듯. 

2019년 여름 베를린은 몽땅 다 타 죽으라는 듯 더웠는데, 기후 위기로 인한 재앙의 징후라는 건 그땐 미처 몰랐었네.
난생처음 맛본 족발에 홀딱 빠졌고, 족발 중독엔 약도 없었으니 뒤룩뒤룩 살찐 육중한 몸을 이끌고 급하게 처방받은 다이어트 약을
오남용하기 바빴다. 몽롱한 상태로 식은땀을 삐질 대며 크로이츠베르크의 음반 가게에 들렀다가 덥석 루 리드의 노랫말과
그의 습작 시를 묶은 책 한 권을 샀다. 친구는 “루 리드가 너의 랭보냐”고 비아냥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랭보를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파리코뮌의 혁명가이자 시인인 랭보와 언제나 늘 세상 끝에 혼자 선 듯 굴었던
망나니 로커이자 시인, 사업가 루 리드 사이를 관통하는 알량한 퇴폐미에 반해 정신 승리는 끝난 상태였다.
어쨌든 그 둘은 모두 얼마나 육감적이고 섹시한가. 아직 젊지만 충분히 어리지 않은 서른 즈음부터 오늘까지
한 달도 쉬지 않고 매달 하드코어한 마감을 쳐내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않는 내게 지금은 헤어진 애인이 그랬다.
“너는 그 망할 마감에 중독된 거야. 너밖에 몰라. 답도 없다. 완전 쩔었어.” 과연 부정할 수가 없었다.
밤새워 뭔가를 하고 천신만고 끝에 맞은 아침, 남들은 출근하는데 그제야 간신히 퇴근할 때면 좋아하는 영화 속 어느 뱀파이어 커플이
동트는 걸 보면서 부드럽고 작게 웃으며 죽어가는 장면을 생각한다. 그 모든 장면이 끔찍하게 멋져서.
마음속에는 늘 자기 자신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몽땅 다 불태워버리고 싶은 폭력적인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 후에 따라붙는 보상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한창 이태원 클럽을 전전하던 시절, 기필코 클럽 마감을 찍은 다음
승리자의 얼굴로 이미 녹다운된 몸에 차가운 물냉면과 소주를 탈탈 들이붓는 이유.
그토록 못생기고 고단하고 넌덜머리 나는 밤의 끝에 기절하듯 만나는 달콤한 잠의 맛. 안락과 평화. 

그해 여름 족발 중독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온 <데이즈드>에 다이어트에 성공한 가뿐한 몸으로 돌아왔다.
여전한 건 여전하고 변한 건 또 변해 있어 아직 데면데면한 편집부 인간들을 무심한 얼굴로 관찰하며 혼자 웃는 시간이 잦다.
온종일 재잘거리는 세상 벅찬 끼순이와 자의식이 과해 보이는 우리 시대 젊은 남자, 우선 심리 상담을 권하고 싶은 귀여운 아웃사이더까지,
다방면으로 무궁무진한 얼굴들이 밉기는커녕 어서 빨리 야금야금 약 올리며 좋은 걸 나누고 싶다. 누군가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먼지 쌓인 나의 첫 <데이즈드>에 그 다짐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거칠고 천박하고 근본 없게. 아름다움과 그를 향한 욕망을 찬미하고 또 저항하면서.’
아, 지나온 시간을 통해 배운 것 하나를 더하자면 따뜻한 시선으로. 웃기게. 
다시 밤이다. 밤의 시간은 고운 모래처럼 고요하니까, 말년의 루 리드가 부르는 ‘Sunday Morning’의 라이브 클립을 이천 번쯤 보고 또 본다. 

 

최지웅
Choi Jiwoong

202210 #188

By EDITOR'S LETTER

‘프리즈 서울’에 다녀왔다. 평소엔 패션 언어를 즐겨도, 어쩌다 한눈을 팔고 싶을 때면 예술 또는 음악으로 눈을 돌리는 게 상책이다. 이번 아트페어의 시장 규모가 얼마나 방대했는지 총수익금이 몇천억 원대에 달할 거라는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나흘간
국내 미술품 총거래액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작품이 판매됐으니, 그림 같은 ‘완판’ 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예술을 향한 대중의 관심이 이토록 뜨겁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실제 예술계에 몸담은 친구와 동행했는데 그의 말이 계속 뇌리에 남는다. “이렇게 성황인데, 국내 작가의 작품은 비교적 수요가 적어.” 물론 박서보를 비롯해 이배, 이우환, 이불, 양혜규처럼 해외 갤러리에서도 작품을 판매하는 거장은 예외다. 그가 느끼는 어려움은 신진 작가들의 경우 국내에 전시할 공간이 마땅치 않고, 실제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는 현저히 적으며, 컬렉터를 만날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프리즈 서울’과 함께 열린 ‘키아프 서울’은 총거래액이 650억원대로, 기존보다 매출이 상승했으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요즘 같은 세상, 누구 말마따나 ‘K’만 붙이면 무엇이든 성공할 수 있는 요즘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이 힘을 얻지 못하는 건 비통한 일. 아이돌 산업에서 영화·드라마 등으로 콘텐츠가 확장하고, 요식업과 뷰티 신scene까지 주목받고 있는 한국은 전 세계에서 문화 측면으로 가장 성황인 나라가 됐음에도 유독 아트 신만큼은 왜 활기가 없는 것일까.

그간 ‘미’의 기준에서 예술을 바라봤다면, 이제 두 아트페어를 계기로 비즈니스 측면을 조명해 봐야 할 때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현상은 젊은 세대가 컬렉터층에 새롭게 진입해 예술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것. 한동안 위축된 소비심리가 되살아나며 패션에서 예술로 관심이 옮겨가는 중이고, 소비자의 경우 투자가치보다 개인의 기호와 성향을 먼저 고려해 작품을 구매한다. 예술 형태 역시 그림보다 조각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한국인은 ‘땅’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자기 공간을 꾸밀 때 조각품만큼 효과적인 장치도 없으니 얼마나 좋은 핑계인가. 벌써 내년에 열릴 프리즈 아트페어가 결정되고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분위기가 다소 과열되어 걱정스럽지만, 미술에 갓 입문한 작가들에게도 작으나마 좋은 기회가 찾아오기를 감히 희망해 본다. 결국 예술 시장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가능성과 희망이 증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젊은 작가들에게 진심으로 바라는 건, 부디 예술의 언어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기회는 열려 있고, 이토록 문화적 호기인 적도 없었으니 지치지 말고 자신의 세계관을 공고히 하라는 응원의 말을 전하고 싶다. 다 같이 더불어 살 수 있어야 세상의
관습과 편견에 맞서 싸울 수 있다. 그런 ‘이타로움’으로 오늘을 다시 살아간다.

오유라
Yura Oh

202209 #187

By EDITOR'S LETTER

씹고 말지.
내겐 고약한 버릇이 있다. 집중이 필요할 때 입을 움직인다는 것. 다양한 분야의 불특정 다수를 만나는 게 업인 기자치고 나는 말수가 워낙 적다. 말하는 데 그다지 쾌감을 못 느끼는 걸 어.떡.해. 그 주둥이는 오롯이 먹는 데 충실한가 본데···.

집중할 일이 잦은 요즘은 뭔가를 씹거나 목구멍으로 흘려 보내는 행위에 힘쓴다. 일을 시작하기 전 워밍업은 필요하기
마련이니까.

과연 ‘씹는다’는 행위는 어디까지 포용할 수 있는가?

영국 프로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 감독이 은퇴 전 마지막 경기에서 씹은 것으로 추정되는 껌이 경매에 나와 39만 파운드(약 6억 6000만원)에 낙찰됐다는데, 씹는 행위가 실제 집중력과 경기력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 걸 알고 있나. 이 행위는 뇌로 흐르는 혈류량을 증가시켜 뇌에 산소를 공급한다. 뇌에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면 뇌 기능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 이로써 집중력이 향상되는 원리다.

그러니까 ‘씹는다’는 게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데, 문제는 누군가를 헐뜯기 위해 ‘씹는다’는 게 잘못됐다는 것이다.
맹목적 사랑을 하기에도 24/7은 부족한데, 대체 무엇을 위해 남을 비난하는 것인가.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는 비단 미국만의 사회문제가 아니다. 세계적으로 무분별한 폭력과 범죄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K-콘텐츠를 빌려 우리 존재를 알리고 그 힘을 더욱 강화하는 것. LGBTQ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다. 소수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배타적이어야 하나. 포용할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고.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니 남 씹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거다. 모두가 다름을 인정할 때 우리 사회는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 않나. 미움은 또 다른 증오를 낳을 뿐이다.

그러니까 씹고 싶으면 가장 원초적인 행위에 집중해. 그럼 인류애가 거기서 나온다고.

오유라
Yura Oh

 

202208 #186

By EDITOR'S LETTER

함께 밤을 지새울 수 있는 벗이 생겼다. 1인칭 시점의 새벽은 영겁의 시간인데, 3인칭의 그것은 순삭瞬削이다. 그는 음악을 한다. 우리의 첫날 밤은 어둠 속에서 최고 사양의 스피커로 음악을 듣는 일부터 시작됐다. 불을 다 꺼버린, 칠흑의 어둠 속에서, 소리에 집중하는 일. 그의 투박한 숨소리 사이로 희미한 음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육체가 닿지 않아도 이토록 육감적일 일? 그는 그렇게 나를 청각의 오르가슴으로 인도한 것이다. 그러곤 내게 묻더라.
청각과 시각 중에 하나를 잃어야 한다면 뭘 선택하겠냐고. 내겐 기필코 시각이다. 보는 행위를 업으로 삼는 나는 그와는 정반대겠지. 하나, 질문의 요지는 이거다. 하나의 감각에 집중하기 위해선 다른 감각을 고의적으로라도 둔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수년 전, 오왼 오바도즈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말했다. 좋은 음악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고. 가슴 깊이 요동치는 것. 가장 원초적이면서 응당한 그의 말이 왜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아 있냐 하면,
어떤 예술보다 음악이 지닌 파급력이 위대하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클래식, 테크노, 로큰롤, 힙합, 보사노바 그리고 재즈까지 음악 안에 수많은 카테고리가 나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좋은 음악은 장르 구분 없이 우리 가슴속을 후벼 판다.
하물며 음악은 미술보다 접근하기 용이하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으니 보다 폭넓게
대중의 취향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 분야 중에서도 절대적 우위를 차지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데이즈드>는 매년 여름이 되면 뮤직&뮤지션 이슈로 찾아온다. 인물마다 개성의 폭은 천차만별이다. 그들의 시작이 어땠든, 어떤 음악을 고수하든, 그들은 ‘음악’이란 이유로, 그리고 <데이즈드>라는 경계선 안에서 연대할 수 있는 무리가 된다. 이번 호에서는 전역 후 첫 정규앨범을 선보일 지코부터 빌보드 200에서 역대 K-팝 솔로 가수 최고 기록을 세운 나연,
아이돌에서 배우까지 섭렵한 박진영, 가장 독자적인 음악으로 미국 시장에서 인정받은 키스 에이프,
파격적인 스타일과 모험을 일삼는 밴드 웨터의 원빈,
호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자신들이 한국인 혈통임을 설파하기 위해 음악을 하는 1300,
한국 힙합의 대중화에 한 획을 긋고 있는 프로듀서 보이콜드까지, <데이즈드>가 오늘날 가장 아끼는 뮤지션을 한데 모았다.

내년 뮤직 & 뮤지션 이슈에서는 최고 아티스트를 한자리에 모으기 이전에, 공연을 한번 마련해야겠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공연 문화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는 요즘,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티스트를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면 우리 독자와 아티스트들이 한결 격의 없이 교류할 수 있을 텐데, 하면서. 무더운 여름날이면 할 법한 설익은 희망을 품어보기도 하면서. 이만 나는 다시 청각으로 싸맨 감각의 제국으로 들어가리라.

오유라
Yura 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