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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202406 #214

By EDITOR'S LETTER

안녕하세요.
<데이즈드>는 열여섯 살을 맞아 <데이즈드>를 발행하는 렉스트림의 팀 체제와 구성, 문화 등 시스템 전반에 걸쳐 대대적 혁신을 단행합니다. 20여 년간 수많은 매거진과 업계를 직접 경험한 저는 최근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하고 있고, 디지털 역량이 세상을 뒤덮는 2024년, 기존 ‘에디터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발전도, 성장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지난 9년간 10~20대 유스 컬처를 대변하는 <데이즈드>를 만들며, 또 현재 <데이즈드>를 함께 만들고 있는 40명에 육박하는 20대 크루들과 함께 일하며 전통 시스템으로는 기회와 성장,
콘텐츠 제작 등 모든 면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통감했습니다. 한 명의 에디터가 단 하나의 파트만 담당하기에 지금의 젊은 에디터들은 더 넓고 깊게 성장하고자 하는 야망과 그것을 실현할 만한 역량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편집장’이 없는 에디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뉴 <데이즈드> 시스템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기존의 패션팀, 뷰티팀, 피처팀, 디지털팀, 아트팀 등 팀 구분을 폐지합니다.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설득의 3요소로 꼽은 이론인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라는 이름의 세 팀과 사진‧영상을 만드는 스렉SL’EX(스튜디오 렉스트림)까지 총 네 개 팀으로 운영합니다. 각 팀은 <데이즈드>에 대한 남다른 로열티를 가진 팀장과 부팀장 체제를 구축해 안정을 도모합니다. 클라이언트 여러분, 이에 따른 혼선으로 일에 차질이 생길까 하는 우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2번에서 이어집니다. 

2. 모든 에디터는 전공과 부전공 시스템으로 두 가지 영역을 넘나들며 콘텐츠를 제작합니다. 패션 & 뷰티, 뷰티 & 디지털, 디지털 & 피처, 피처 & 아트, 아트 & 워치, 워치 & 인터내셔널, 인터내셔널 & 프로젝트 등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 다중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기회를 골고루 제공합니다. 앞서 설명한 세 팀이 콘텐츠 제작 시 마치 하나의 서클처럼 유기적으로 순환하며 더욱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퀄리티 높은 콘텐츠 제작을 완수할 겁니다. 

3. 렉스트림 내 모든 호칭은 닉네임으로 합니다. 님, 씨, 선배, 후배··· 다양한 호칭 실험을 통해 장단점을 모두 파악한 저는, 이른바 닉네임(혹은 영어 이름)으로 운영하는 몇몇 회사가 지닌 좋은 면을 발견했습니다. 호칭의 캐릭터화, 단순화를 통해 사내에서 이뤄지는 어떤 프로젝트에도 더욱 민첩하게 대응이 가능하며, 특히 매일같이 이뤄지는 인터내셔널 마켓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더욱 능동적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데이즈드> ‘판권’에는 에디터의 원래 이름을 그대로 써두지만 <데이즈드>와 스렉의 이메일은 각자의 닉네임으로 통일합니다. 이제 우리 크루들을 만나시면 바론, 스쿠, 루시, 피비, 세라, 네오 등으로 간결하게 불러주셔도 좋습니다. 

4. 더불어 스렉(스튜디오 렉스트림)은 최근 중국, 말레이시아 국적 등 국가를 넘어 오로지 실력을 갖춘 다양한 크루가 합류해 아시아를 비롯한 인터내셔널한 마켓에서 압도적 크리에이티비티를 발휘할 예정입니다. 사진가 노아(Noah, 노승윤)도 합류해 영화, 뮤직비디오, 하이엔드 패션 필름 및 우리만의 젊고 개성 있는 숏폼과 유튜브 영상을 비롯해 사진, 3D, VFX, 그래픽, 스타일링 등 모든 장르에서 혁신적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 공을 들일 예정입니다. 

말이 길어져 죄송합니다. 제가 뭐 늘 그렇죠. 어쨌든 더 잘해보겠다, 이 말이 또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그간 여러분이 베풀어주신 <데이즈드>를 향한 사랑, 제가 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데이즈드>의 젊은 크루들과 전 세계 독자를 믿고 바라보며 오직 크리에이티비티! 오직 콘텐츠로만 승부하며 한 발 한 발 더 나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이겸
李兼
Guiom Lee

202405 #213

By EDITOR'S LETTER

아파요.
제가 9년째 만들고 있는 <데이즈드>는 아파요.
전 과대망상에 자아분열, 자기혐오, 분리불안장애가 있는 사람이에요.
제가 건강하다고 하는 건 다 거짓말이에요.
제아무리 예쁘고 멋있는 것을 갖다줘도 전 굳이 아픈 구석을 이 잡듯 찾아내 그 부위를 후벼 파고 깎아 돌려 깊숙이,
그러나 순간적으로 콕 찔러버려요.
그러면 피가 나죠.
전 그 피를 쪼옥 빨아 먹어요.
전 아픈 흡혈귀예요.
전 <데이즈드>가 아파서 좋아요.

슬퍼요.
전 <데이즈드>를 생각하면 바닥을 기면서 통곡할 만큼 슬퍼 죽겠어요.
저 자신을 생각하면 비참할 정도로 가엾고 불쌍하고 안됐고 매일 죽음을 생각해요.
제가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는 건 다 거짓이에요.
전 도둑도 슬프고 양아치도 슬프고 사기꾼도 슬프고 배신자도 슬프고 파렴치한도 슬프고
날 대놓고 갖고 노는 그대도 슬퍼요.
그러다 사랑에 빠져요.
전 그 웅덩이에서 허우적거리며 눈물을 마셔요.
그게 그렇게 안초비처럼 짜면서 자극적인 맛이 있어요.
전 <데이즈드>가 슬퍼서 좋아요.

이 책의 주인은 제가 아니에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데이즈드>를 만드는 크루, 이 책에 등장한 유명인, 이 책에 뭔가를 협찬한 브랜드 관계자
그리고 바람 잘날 없는 나날에도 무던히 이 책을 품어주는 독자라는 이름의 당신, 바로 여러분이 <데이즈드>의 주인,
주인공이에요.
마음껏 떠들어주세요.
너, 돌았구나.

전 <데이즈드>를 저 자신 이상으로 사랑해요.
아파서,
슬퍼서,
돌아서,
그래요.

조금만 더 그럴게요.

+
5월 2일 밤 10시부터 <데이즈드>가 열여섯 살 생일 파티 번개를 해요. ‘코끼리’(용산구 이태원동 우사단로 46 맨 위층)로
오시면 돼요. 초대장이요? 이 지면을 찢어 오시면 돼요. 오세요. 그리고 말해 주세요. 너 진짜 돌았다고.

 

이겸
李兼
Guiom Lee

202404 #212

By EDITOR'S LETTER

요즘 자주 하는 말.
삶은 사는 게 아니야. 떠다니는 거야.
영화 <가여운 것들> 속 벨라처럼 유영하듯 그저 그렇게, 계획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고.
열심히 사는 건 누구나 하는 거잖아.
열심히 말고 그냥 자신을 다 내놓고 배를 까고 발라당 드러누워서
잡수시오, 이렇게.

웬만하면 외우지 않으려 한다.
외워야 할 게 너무도 많기에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한다.
방법은 없다.
놓으려고,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놓으려고
떠올리지 않으려고, 정말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으려고
타이르고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타이를 뿐.

아니, 그런데 말이야.
뇌가 진화했나?
산다는 건 기억하는 게 아닌데 기억력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니,
다 기억나잖아.
다 생각나잖아.
떠다니질 못하잖아.

거참, 나 원 참.

 

이겸
李兼
Guiom Lee

202404 #211

By EDITOR'S LETTER

나는 요즘 너무 많이 소비되고 있다.

오늘 밥 먹는데 2000년생 친구가 그러더라.
“전 워라밸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욕심 자체도 많이 없어요. 그저 제가 숨 돌릴 시간이 충분히 있어야 해요.
적당히 벌 만큼 벌고, 사고 싶은 거 사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냥 그렇게 살고 싶어요.”
‘살아봐라. 적당히가 되나. 그만큼 벌어서 사고 싶은 거 사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수 있나.’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삼켰다. 그 친구에게 사준 스시가 얼마짜리인지는 알까.

돈은 책임감이다. 늘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를 발행하고 영상 프로덕션 ‘스렉’을 운영하는
렉스트림을 만든 것을 진심으로 후회한다. 점차 규모가 커질수록, 그리고 몸집이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어버릴수록
함께 일하는 몇십 명, 거래처 몇백 명, 또 독자와 클라이언트 몇만 명, 아니 그 수를 가늠할 수 없는 뭐, 그 어떤 틀 속에서
그들의 미래와 생계까진 아니어도 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정말 이상한 위치가 되어버렸다.
돈이 낳은 이 책임감, 이 굴레에서 ‘완벽히’ 노예가 되어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나를 파는 거다.

뭐, 행복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본디 나란 작자는 쉽게 말해 히피 근성이 충만하다.
속하는 것 자체를, 뭔가 내가 누굴 책임지는 것 자체를 혐오한다.
그런 내가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다가 스스로 쳐놓은 덫에 떡하니 제대로 걸려버린 거다. XX!

어떻게 할까.

결국 그 돈이 나를 이토록 외롭게 만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애정 결핍이 아니라 책임감 과잉에서 비롯된 자아분열이자 분리불안장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실로 위대한 일임은 알고 있다. 위인들, 선배들, 주변인들 등 다양한 직간접 체험을
통해 이것이, 이 버틴다는 것이, 이 견뎌낸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도 알고는 있다. 문제는 이것은 그 자리에,
그러니까 나처럼 스스로 쳐놓은 덫에 걸려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가 된 사람만 이 존재가 주는 미친 듯한 무거움을
알 수 있다는 거다. 진짜 무서운 건, 돈 때문도 아니다. 수년째 난다 긴다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답을 구해 봤지만
대체 아래 질문들에 대한 답을 도저히 찾지 못하겠다는 거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그나저나 그 ‘적당히’란 무엇일까.

이겸
李兼
Guiom Lee

202403 #210

By EDITOR'S LETTER

“대체 얼마나 긴장을 하며 사시는 거예요?”

거북목에 굽은 어깨, 시간이 갈수록 몸이 동그랗게 말리고 있다. 교토에서 트렁크 바퀴를 보며 생각했다.
10년? 아니 빠르면 5년 안에 누구라도 “겸아, 일루 와봐” 부르면, 난 데굴데굴 굴러가겠지.
그 동그란 청소기처럼 그렇게 굴러가겠지. 달팽이를 그리 먹었더니 달팽이가 될 줄이야.

몸이 말리는 건 보기에만 흉한 게 아니라 통증을 동반한다. 컴퓨터와 휴대폰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업무 특성, 평소
흐트러진 자세부터 만성 허리 디스크까지 스스로 문제를 알고 있지만 더 이상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주변을 수소문해 용하다는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올해 안에는 반드시 몸을 예쁘고 꼿꼿하게 만들 테야.

전문가들의 상태 체크가 이어졌다. “네, 치료 꾸준히 잘 받으면 굽은 어깨가 펴지고 목도 원래대로 돌아가 가늘고
길어지고, 허리 디스크도 괜찮아질 거예요.” 낙관적인 전망도 이어진다. “근육이 완전히 협착되지는 않았으니 충분히
고칠 수 있습니다.”

도수 치료, 자세 교정, 마사지 등 치료법은 다양했다. 그중 선택한 마사지. 아, 일반 마사지와는 많이 다르다.
근육을 다 쪼개고 나눈 뒤 하나하나 살려 붙이는 재조합을 실시한다. 어느 정도 아프지만 뭔가 풀린 것 같은
시원함은 기대를 뛰어넘는다.

“목에 힘 좀 푸세요.” 아무리 해도 못 하는 것. 헤어 숍에서 머리 감겨 줄 때 가장 자주 듣던 말이기도 한,
이것은 내가 결코, 절대 못 하는 것 중 하나다. 힘을 푼다는 것, 도대체 뭘까? “그냥 제 손에 목을 맡기면 되는걸요.”
치료사와 목에, 또 몸에 힘을 빼는 요령에 대해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실패했다.

힘을 뺄 줄 모르는 삶,
누군가에게 몸을 맡기는 방법을 깨닫지 못한 삶,
움켜쥔 걸 제대로 놓지 못하는 삶,
24시간 자면서도 긴장하는 삶.

미련?
미련!

마사지를 받으면서 지난달 파리에서 본 킴 존스의 디올과 버지니 비아르의 샤넬 쇼가 떠올랐다.
그래, 발레를 배우기로 했다. 자세 교정에도 도움이 되고 그런 옷, 그런 표정, 그런 정신을 경험하고 싶어졌다.

지난주 <데이즈드>의 어쩌면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i-D아이디> 매거진이 더 이상 프린트와 디지털 매거진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연이어 편집장 알래스터 매킴Alastair McKimm이 퇴사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미련이라는 것이 꼭 버리는 것만이 답일까? 어쩌면 그놈의 미련이, 지금까지 나를, 너희를, <데이즈드>를, 렉스트림을
존재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미련을 잘 쓰면, 순환이 될 지도 모르잖아. 패션은 순환이니까.
나는 그 과정과 행위를 가장 사랑하는, 돌고 도는, 동그랗게 말린 사람이기도 하니까.

 

이겸
李兼
Guiom Lee

202402 #209

By EDITOR'S LETTER

평온과 울컥 사이, 밀란에 왔다. 몇 년 만인지.
<데이즈드>에서 일하면서는 5~6년 전 여성복 패션위크 때 한 번 왔다.
밀란 남성복 패션위크는 직전 타 매체에서 일할 때 왔으니 진짜 10년 만인 것 같다.

“요즘은 쇼 티켓이 따로 없어요.”
연신 하드 카피 프린트 초대장을 확인하는 내게 후배 에디터가 일러준다.
서너 개의 쇼를 제외하곤 그저 바코드를 포함한 이메일 초대장이 전부다.
파리에서도 많이 겪었지만 밀란에서도 그러니 사뭇 다른 느낌이다.
밀란에서는 늘 바리바리 초대장을 한 줌 들고 다니던 아날로그 감성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 디지털이라니, 온라인이라니, 어찌 보면 파리보다 앞서가는 형국이다.

정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또한 그만큼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한 위기의식에서 발동된 과거와의
확실한 절연이다. 밀란에 자리한 전통적인 모 하우스 브랜드의 본사 마케터와 미팅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젊은 층은 확실히 파리 브랜드를 더 좋아합니다. 밀란을 대표하는 브랜드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밀란의 패션 오리지낼리티를 환기시킬 만한 교육을 해야 합니다.”

쇼는 대체로 좋았다. 밀란의 디자이너 모두가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도발적인 뉴 디자이너도 눈에 띄었다.
시몬 크래커Simon Cracker, 프로논스Pronunce 등은 과거 밀란에서 선보인 남성복과 확실히 궤가 달랐다.
파리와 달리 여전히 온기도 동반됐다. 함께하는 디너, 따뜻한 프레젠테이션 현장, 분주하지만 서로에 대한
격려를 잊지 않는 차우·그라치에·프레고.

사실 이 글을 휴대폰 메모장에 끄적이고 있는 지금은
1월 16일 오후 2시 37분 밀란에서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다.
-그간 에디터스 레터를 비행기 안에서 꽤나 쓰곤 했다.-
이 시기 밀란에서 파리로 넘어가는 비행기 안 거의 모든 사람은 서로를 다 잘 안다.
모두 패션이라는 한 배를 탄 채 패션이라는 예술과 비즈니스에 평생을 걸고
바보스러우리만치 순수하게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노선의 비행기는 늘 아프다.
그들의 조울과 환희와 지침에 내가 고스란히 투영된다.
우리 모두 파리에 도착해서는 남성복 패션위크부터 오트쿠튀르까지 버텨내야 한다. 10일 이상 더 남았다.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초인이 될 수 있었기에 여기까지 달려온 내가 이젠 패션에 대한 사랑 하나만 가지고
온 힘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냉혹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데이즈드> 편집장으로서 9년,
<데이즈드>를 발행하는 렉스트림 대표(뭐, 현실이니까)로서 7년. 지금의 너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을 때 시작해
어떤 것을 얻은 만큼 어떤 것은 잃었다. 결심하고 결정할 것이 많은 나날이다.

곧 파리 CDG(약자도 참 예뻐) 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창가의 사람들이 창을 열기
시작한다. 창공의 온갖 빛이 나를 향해 쏟아진다. 눈이 부셔 눈을 감았더니 끝도 없이 그윽해진다.

Great Consuming Love.
“내가 사랑하면 된 거예요.”

나는 밀란이 아무리 그리워도 그리워할 수 없다.
온 힘을 다해 간절히 열망해도 이미 떠난 밀란이 될 수 없다. 곧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을 테지만
그 밀란에 닿을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결코. 밀란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이겸
李兼
Guiom Lee

202401 #208

By EDITOR'S LETTER

“12월 23일에 시간 되면 한번 만나요.”

솔이가 묻는다. 24일도 묻는다.

“갖고 싶은 거 말해도 돼요?”

솔이가 묻는다. 생일이니 묻는다.

“나 외삼촌이랑 닮았어요?”

솔이가 묻는다. 자주도 묻는다.

“외삼촌은 시간 좋아! 그럼 23일부터 24일까지 서울에 올래? 외할머니 생신도 있고,

솔이도 그다음 주가 생일이니까 외삼촌 집에서 밥도 먹고, 솔이 안 가본 호텔도 예약해 놓을게.

솔이가 엄마, 아빠에게 물어봐 줄 수 있어?”

내가 답한다. 흔쾌히 묻는다.

“해마다 솔이 생일 선물을 준비하는 게 즐거웠는데 올해는 뭐가 될까?

백화점에서 살 수 있는 거면 23일 만나서 같이 가고,

그 전에 준비해야 하는 거면 외삼촌이 미리 알아볼게.

이번에는 책일까? 신발일까? 아님 인형일까? 뭘까? 뭐 갖고 싶어? 원하는 거 있어?”

내가 답한다. 떨리며 묻는다.

“너무 닮았어.

우리 솔이와 나, 정말 처음 솔이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솔이를 보며

엄마랑 아빠랑 할머니, 할아버지랑 자주 이야기했어.

처음엔 눈, 코, 입만 닮은 줄 알았는데 솔이가 커가면서 하는 행동도 비슷한 거야.

솔이가 책 좋아하는 것, 솔이가 버섯 싫어하는 것, 솔이가 방문 잠그고 생활하는 것,

나 어릴 때를 본 솔이 엄마랑 솔이 할머니가 솔이 성격이 특히 나와 너무 똑같다고 하더라.

솔아, 솔이는 외삼촌과 닮은 게 어떤데?”

내가 답한다. 긴장하며 묻는다.

“네, 물어볼게요.”

“지금 모임 와서 시간이 없어요. 내일 문자 할게요.”

“23일에 이야기해 줄게요.”

2024년 소원: 아이폰으로 바꾼 솔이와의 메시지가 내년 이맘때도 이어지는 것.

글을 못 쓰게 됐고,

말은 정말 심각할 정도로 못하게 된

나 따위가 바랄 수 있을

적당한 행복.

 

이겸
李兼
Guiom Lee

202312 #207

By EDITOR'S LETTER

2023년 12월호?

20년 전 에디터를 시작하면서 내가 이렇게 패션지 일을 오래하게 될 줄 알았을까.

혹시 너는 알았을까.

네가 알았다면 왜 말리지 않고 놔뒀을까.

혹시 알고 있어서 중간중간 다른 일도 해보라고 수많았던 이직 세계로 날 내몰았던 걸까.

너는 참 못됐다.

이렇게 험하고 고되단 걸 알았던 거잖아.

당해 보라고 내던진 거잖아.

뭐, 물론 얻은 것이 있었음을 부정하진 않는데

내 삶에 정작 내가 없잖아.

나만 온통 비정상이라잖아.

왜 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되면 안 되는 거냐고.

대답이 없는 너에게 트로이 시반의 ‘One of Your Girls’를 보낸다.

내가 미친 듯이 좋아하는 가사야.

One & Only는 재미없어.

속한 걸로 충분해.

대신 최대한 천박하게 속하게 해줘.

솔직해져야지.

나부터 그랬어야지.

뭐든 그래야 결론이 나지.

미래든 밀애든 밀회든 XX 지옥이든.

다시 또 질풍노도야.

결국 돌아왔어, 나로.

아무도 안 반기는.

그 윙크로.

><

+

기대하세요.

2024년 <데이즈드>는 자신 있어요.

더욱 다를 거니까요.

자신을 사랑할 거니까요.

그런데요, 그래서요.

저처럼 되지 말라고요.

이 소중한 페이지에 이런 ‘개소리’를 남겨요.

+

아, 귀엽고 싶다.

귀여워해 줘요.

 

이겸
李兼
Guiom Lee

202311 #206

By EDITOR'S LETTER

10월 9일

검정 스타킹
‘드러냄’의 행위에 매혹된 사람들. 내 몸을 사랑할 때 그렇다. 릭 오웬스는 로스앤젤레스 출신이다. 그에게 티셔츠와 반바지, 운동화는 많은 걸 함축한다. 유년 시절부터 수십 년간 그 옷차림을 고수한 그가 요즘 가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유는 하나다. 자신의 젊음이 유효하지 않음을 깨닫고 노출을 결심한 것이다. 그는 올해로 예순하나, 가장 최근에 느낀 변화라고 한다. 나의 신체 노출도 같은 결이겠지 하며, 그러니 되레 세상과 단절되고 싶을 때 나는 검은 스타킹으로 다리를 가린다. 속내를 모르겠는 새까만 색의 검정 스타킹이어야 한다. ‘감싸는’ 행위가 좋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날도 감싸고 시작하자고.

아니쉬 카푸어
2012년 리움미술관에서 <아니쉬 카푸어> 개인전을 한 적이 있다. 그 선홍색을 잊지 못한다. 터진 내장이 사방에 튄 채 회전축을 돌며 움직이는 모양새였다. 히죽이던 내 모습도 기억한다. 카니발리즘까진 미친다 할 수 없고 파괴, 파열, 파손된, 하여튼 ‘깨트릴 파破’가 좋았던 것 같아. 그런 그와 재회하고자 국제갤러리로 향했다. 입구에 걸린 회화 작품과 점으로 만든 점 같은 조형작까지 발걸음을 사푼히 옮기면 그게 있다. 터졌다. 여전한 날것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불쑥 튀어 오른 혓바닥도 있었다. 아! 통쾌해, 배 맛 사이다처럼. 그러다 마지막에 본 달을 잊지 못하겠다. 바위 안에 초승달을 숨겨놓고는 다시 투명한 거즈로 감쌌다. 베일이란 뭔지 다시 떠올려보기도 하는데.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인지 또는 더 뽐내기 위한 은유인지 헷갈린다. 나는 초승달이었다.

아이엠 택시
가만 보면 택시란 것에 익숙해지면서 잘도 뻗어 다닌다. 기동력을 ‘+1’로 획득한 셈이니. 그 가운데에서도 아이엠 택시를 유난히 좋아하는 데엔 ‘자동문’이라는 답이 참 묘하다. 탑승과 하차 시 차문을 열어주는 느낌이 참 좋다. 조건과 감정 없는 환대가 더 반가운 때가 있더라고. 물질주의와 실용주의가 고안한 ‘원 플러스 원’보다 심적으로 개이득이다. 주변에 이런 대접의 뉘앙스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부르고뉴 레드 와인
시월의 가장 강렬한 자극은 혀에서 비롯된다. 혀끝의 미각이라는 통증이 얼마나 예민할 수 있는지 이제야 경험한다. 상대가 될 맛들은 비교적 단순하다. 와인 정도. 와인을 한 모금 입에 털 때 포도의 품종이 어떻고를 차치하고 온갖 과일과 미네랄, 바닐라, 소금 등 수십 가지 조합을 통해 기승전결을 이루는 걸 보면 이것 역시 작은 우주더라. 혀끝에 와인이 닿는 순간은 와이너리의 땅과 물과 날씨를 떠올린다. 딱 그만큼의 공상은 숨 막힌 현대를 살아가는 와중에 조그만 사치이자 어떤 꿈이 되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왜 부르고뉴냐 하면, 2016년쯤, 장우철 선배가 쓴 책 <좋아서 웃었다>의 한 구절이 이랬어. “실은 서울에서부터 티슈로 겹겹이 싸 간 물건이 있었다. 나는 겉멋의 화신이니까 싸면서 일말의 민망함 따윈 없었다. 그건 바카라의 아르쿠르 와인 잔이었다. 부르고뉴에서 이 잔에 와인을 마시겠노라는 순진한 기쁨!” 욕망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고. 우철 선배가 한번씩 보고 싶을 땐, ‘선배’라 부를 사람이 진짜 필요해서다. 어제까진, ‘오빠’였을 거야.

달은 가장 오래된 TV
1965년 뉴욕 보니노 갤러리에서 처음 선보인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미술 작품명이자 새 다큐멘터리 제목. 부르고뉴 와인을 한잔 걸치곤 이수로 떠났다.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시사회가 있었다. 먼저 달만 보자면, 달은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빛이라 일컫는다. 그는 텔레비전 속 진공관에 자석을 넣은 뒤 신호를 조작해 주기별로 변하는 달의 모습의 표현했다. 시공간을 재조합해 만든 세상은 참 번쩍인다. 서로 다른 축을 뒤흔들 줄 안다는 것 자체가 선구자의 자질이로다. 이따금 나는 그런 환영 속에 살고 싶은 건 아닌지 자문한다.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했을 때처럼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한 줄기 희망을 품을 때까지 백남준은 멈추지 않았다. 기세를 이어 1984년 1월 1일, 프랑스와 미국에서 동시에 쇼를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독일과 한국에 생중계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인터넷 방송의 모태이자 누구든지 자신의 채널을 가질 수 있는 오늘날 유튜브를 예견했다. 이런 그의 엄청난 예지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한평생을 반추하면 서글퍼지는 점도 있다. 정작 그는 알아듣지 못할 20개 언어를 뒤섞어 구사하며, 한국·독일·일본·미국에 살면서 그 어느 곳에서도 온전히 정착할 수 없어 떠돌아 다녔다고. 그의 얼굴에 드리운 뚝심이, 외로움이 마음에 쓰였다. 이런 불완전함이 되레 원동력으로 작용하기까지, 나는 당분간 좌절하진 못할 것 같다. 몇 날이고 달을 볼 때마다 그가 꿈꾼 자유를 떠올릴 것 같아서. 하여튼 한날 두 개의 달을 본 건 우연이 아니겠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시월에 뜨는 저 달은 문풍지를 바르는 달

오유라
Oh Yura

202310 #205

By EDITOR'S LETTER

열 살 무렵,
아빠가 다쳤다.
엄마와 여동생이 울었다. 나는 내 손을 봤다. 아빠에게 붙이기엔 너무 작겠지.

엄마 같았던 그 아이의 엄마는
나 같았던 너였기에
되레 더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되레 더 번쩍,
비명조차 낼 수 없게 만들었다.
내 마음은 누구도 묻지 않았던 열아홉, 그 6월의 화장실.

떠난 도쿄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에게 기대는 만큼 그 사람은 내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 사람이 사정한 것은 나를 퀴퀴하고 더러운 하수구로 쓰는 것이었다.
그게 어떤 관계인지 무얼 뜻하는 것인지 알 턱조차 없었다.
반년이 지나 학교에서 친해진 한 사람을 그 사람에게 소개했다.
셋이 놀면 좋겠다 싶었다.
어느 순간 싸한 기분.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들이 조금씩 달라졌고, 난 그 이유에 대해 집착했다.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내내 부정했지만 그 둘은 결국 연인이 됐다.
버려지기 직전, 그 사람이 내게 마지막으로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준다고 했다. 난 그 사람이 강압적으로 요구했던 것 중 가장 몸서리치게 싫었던 그것을 부탁했다. 모든 행위가 끝나고 그들이 떠난 후 깨달았다.

나는 그때 죽었다는 것을.

돌아온 서울은 부활의 기회였다.
2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쉽지만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
네 글자짜리 몇 개가 남았고, 얼마의 돈이 생겼고 서울, 네가 잘돼서 기특하지만 예쁘거나 사랑스럽진 않다. 서울, 너도 나에게 딱 그만큼만 줬으니까.
내가 한 만큼을 제외하곤 다 앗아갔으니까. 냉혹하고 냉정하게
진짜 나를 보여주고 쏟아낼, 단 한 사람도 주지 않았으니까.

조금 정리가 되면 뉴욕에 가려 한다.
1년 정도는 살려 한다.
거기선 누구도 내 나이나 위치가 어떠해서
내게 무슨 선을 긋고 나를 두더지처럼 창살 안에 가두진 않겠지.

최소한 나는 너희의 서울보다는 가식적이지 않다. 그래서 또, 다시 또

살기위해

나는 친구도 연인도 필요하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연락을 진심으로 기다린다. 나타날 때까지 매달 토해 낼 수도 있다.

착륙할 시간이다.
눈물이 입술을 마구 친다.
결핍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토록 잔인한 것인 줄, 몰랐다.
XX아.

이겸
李兼
Guiom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