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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201905 #135

By EDITOR'S LETTER

 

 

PRINT IS THE NEW LUXURY

분명 본 책이나 영화인데 본의 아니게 다시 보다 보면 전혀 새로운 줄거리가 된다. 시간의 간격을 두고 내가 처한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나 또한 마찬가지다. 매번 이맘때 쓰던 편집장 글을 같은 모니터와 키보드를 두고 쳐 내려가고 있거늘, 전혀 새롭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의 새 공간, 성수동(연무장길 1)에서 맞이하는 첫 마감이다.

 

디지털과 이커머스가 아무리 무성하다 한들, 아니 무성해지면 질수록 직접 경험이 주는 가치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누구나 인터넷으로 파리 패션위크나 코첼라 공연을 볼 수 있지만 현장에서 주는 번뇌와 쾌락을 어찌 따라올 수 있겠는가.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하루 종일 영상 통화로 서로의 안위를 물으며 안락을 느낀다 한들 직접 만나서 안았을 때에 비한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하루면 도착하는 이커머스 서비스에 새삼스레 놀라긴
하지만 매장에 가서 상품을 직접 보고 입어보며 고민하는 행위야말로 쇼핑이 주는 가장 원초적인 재미다.

 

PRINT IS THE NEW LUXURY.

는 홈페이지뿐 아니라 인스타그램,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에 이어 최근 틱톡도 개설했다. 한 달도 채 안 돼 틱톡의 팔로어가 2만6000명을 넘어섰으니, 고무적이다. 그러나 나는 는 책으로 볼 때만 느낄 수 있는 ‘뭔가’에 대한 고민을 놓치 않을 것이다.
는 책으로도 보관 혹은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들도록, 그것이 주는 경험에 집중할 것이다.

 

OFFLINE IS THE NEW LUXURY.

나는 무리해서라도 단독 건물로 이사하고 싶었다. 많이 넓지는 않아도 의 성수동 사무실은 1층이 비어 있다. 이곳이 나는 와 결을 같이 하는 다양한 젊은 친구와 만나는 장소가 되길 희망한다. 5월부터 준비하고 있는 각종 소동에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모두가
참여하고 공유하길 바란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아도 되는 각자의 이상을 이야기하게 되길 원한다.

 

누구든 이 공간에서 재미있는 것을 기획하고 싶다면 언제든 내게 메일을 보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나둘 모여, 를 들고
의 사무실에 찾아와 나름대로 즐겨준다면 나는 조금의 퉁명함도 없이 이내 이렇게 말할 거다.

“마음에 든다니 정말 기뻐.”

 

마치 내 건물이라도 되는 양 호기롭게, 늘 그랬던 것처럼 당당히. 

201904 #134

By EDITOR'S LETTER

 

 

AT YOUR BEST YOU ARE LOVE

파리에 가면 꼭 ‘카페 드 플로르Cafe de Flore’를 가고 싶었다. 장 폴 샤르트르는 내게 뮤즈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카페 드 플로르에서 나눈 시간들의 냄새라도 맡을 수 있다면 내 존재감은 지금보다 현실의 지배를 덜 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기회는 빨리 왔다. 2003년 겨울, 잡지사 에디터를 한 덕분에 패션위크 참여차 파리를 가게 됐다. 20대 초반 혈기왕성하던 나는 샤를 드골 공항에 내려 북역 근처인 10구의 엘리베이터는커녕 계단조차 낡은 6층의 호텔 방에 짐을 풀자마자 그곳으로 향했다.
카페 드 플로르는 9시가 넘은 밤이었다. 그날의 옷차림마저 기억나는데, 거금을 들여 구입한 에디 슬리만이 만든 디올 옴므의 흰 머플러가 포인트였고, 겉옷은 디올 옴므스러운 H&M 사파리 재킷이었다. 파리 통신원(아마 미리 예약해준)과 한국에서 함께 출발한 두 명의 동지도 함께였다. 강낭콩 색 의자에 앉아 ‘킁킁’ 샤르트르의 구토 찌꺼기라도 맡으려고 할 때쯤, 자그맣게 파리 통신이 이야기를 건녰다.
“저기, 그가 있어요.”
칼 라거펠트였다. 동양인으로서 미국 패션 매거진의 중심부를 뚫고 있던 스테판간Stephen Gan과 함께였다. 내 손에는 사진과 동영상을 찍을 수 있는 산요의 노란색 작은 카메라가 들려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던 혈기왕성한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부탁, 도저히 그 사진을 찾을 길이 없지만 분명 그렇게 첫 파리, 첫 카페 드 플로르에서 그와 사진을 찍었다. 쿵쾅거리던 심장 소리가 여전히 생생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런던, 밀란, 파리를 전부 다 돌기는 무리한 스케줄이었다. 런던에서의 패션위크가 끝나고 밀란으로 가기 위해 히드로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계속 투덜댔다. 비까지 왔다. 나 스스로에게 ‘이제 부디 네 나이와 체력을 인정하렴’ 다그치며 눈을 감았다.
“그가 떠났대요.”
서울의 지인이 칼 라거펠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외신의 기사 링크를 더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운 좋게도’ 직접 본 그의 생전 마지막 피날레가 돼버린 뉴욕 메트로 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린 지난 샤넬 공방 컬렉션부터 카페 드 플로르에서의 추억까지 머릿속에 소환됐다. 그 앞에서 나는 스물세 살이기도 하고, 서른아홉 살이기도 했다.
자크 드 바셰르Jacques de Bascher. 밀란에서 펜디 쇼를 보며 진정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원조다운 그의 역량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하다가 파리에 도착한 첫 날 밤, 자크 드 바셰르를 떠올렸다. 밀란에서는 후배 에디터와 한 방을 써 별다른 생각을 하기에도 힘들긴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던 칼 라거펠트의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알려진 것은 2017년 발행된 전기 작가 마리 오타비Marie Ottavi가 쓴 자크 드 바셰르 자서전 를 통해서다. 자크 드 바셰르는 1951년 베트남 사이공에서 태어난 귀족 집안 출신의 사교가로 칼 라거펠트와 20년 가까이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장 폴 샤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관계만큼이나 남달랐는데, 라거펠트는 오타비에서 “나는 자크 드 바셰르를 사랑했으나 우리는 신체 접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I infinitely loved that boy but I had no physical contact with him”라고 이야기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더불어 자크 드 바셰르는 이브 생 로랑과 은밀한 관계를 맺는 등 자유롭고도 심미적인 둘의 관계는 서른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크 드 바셰르가 에이즈로 사망하면서 끝나게 된다. 자크 드 바셰르가 죽기 전날 밤, 라거펠트는 함께 있었다.
“칼 라거페트는 그의 어머니와 1989년 에이즈로 죽은 자크 드 바셰르의 골분을 섞어 흩날려질 것이다.” 샤넬의 발표가 이어졌다. 라거페트는 항상 자신의 장례식은 없을 것이며, 죽은 후에는 유골 가루를 자크 드 바셰르와 섞어 항아리에 담아달라고 이야기했다. The Beat Goes On. 샤넬 쇼에 도착하자 자리에 칼 라거펠트와 가브리엘 샤넬이 함께 있는 일러스트가 이 말과 함께 놓여 있었다. 쇼를 보는 내내 나는 패션보다 사랑을 생각했다. 사랑이 없는 패션은 사과나무에서 오렌지 향을 맡으려 하는 것이 아닐까.

카페 드 플로르에 가게 된다면 꼭 너와 함께여야겠다. 

 

 

 

 

  

201903 #133

By EDITOR'S LETTER

 

 

알고 싶어요
 
 
이달이 마지막입니다. 놀라셨나요? 사실입니다. 가 논현동에서 성수동으로 이사를 갑니다.
따라서 논현동에서 마감하는 것은 3월호, 이달이 마지막입니다.
 
물론 장소가 아닌 저희 팀원 중에 이달이 마지막인 사람도 있습니다. 지난달이 마지막인 사람도 있었고,
또 다음 달이 마지막일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또 그만큼 새로 들어오는
사람도 생기고, 회사라는 것이 순환되는 게 맞겠죠. 게다가 젊은 친구들이 많은 이곳은 더더욱 그 사이클이
빨라지기 마련입니다.
 
본의 아니게(?) 회사를 운영하며 편집장 역할을 하게 된지 어느덧 20개월이 넘어갑니다. 오늘날 과연
회사가 무엇이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조금 더 좁게 말하면 잡지사가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시스템을 통해 무슨 비전을 제시하고 어떻게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네, 전 대기업의 아들도 아니고 슈퍼맨도 아니며 부자도 아니니까요. 취미로 혹은 생색내기로 패션 매거진을 
운영할 여력이 전혀 없다고 해야 할까요. 고로 다른 곳처럼 안정성이나 인센티브는 물론이며 명함 하나로
부모를 만족시켜 효자가 될 수 있는 기회조차 주기 어려웠습니다.
 
그저 일을 기회로 생각하고 차근차근 자신의 개성이 담긴 창조적인 포트폴리오를 모아 브랜드가 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작은 회사답게 의사 결정부터 실행까지 더 빨라져야 한다고 했고, 의리는 없더라도
근무하는 동안 최소한의 애사심은 갖자고 이야기했습니다. 모방하지 말자 했고, 다르자고 했습니다. 아직은
보이지 않는 각자의 씨앗을 잘 숙성시켜 자본주의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돈이 되는 능력으로 완성하자고
했습니다. 대개의 날은 선생이 된 기분이었고, 어느 날은 한 가정의 가장이 되기도 했다가 어느 날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목소리조차 듣기 싫어졌습니다.
 
결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저를 포함해 라는 회사는 식 사회를 통해 ‘사회화’되는 
중입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15명이 넘었습니다.
 
편집장 겸 발행인은 편집장보다 더 엄격해야 하는지 아니면 더 친근해야 하는지, 2020년대 패션 매거진은 
어떤 인력을 충원해 어떤 파트에 투자해야 맞는지, 막 시작한 일종의 스타트업에서는 어떤 위계질서를 주고 
화합해야 맞는지 등 알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일단 저희는 이사를 결정했고, 갑니다. 아마 국내에서 제가 알기로 단일 매거진 잡지사가 하나의 건물을 
쓰는 것은 처음일 것입니다. 겁이 납니다. 제게 인간적인 조언을 해주실 분을 간절히 기다리겠습니다. 
전 오래 하고 싶기보다는 한순간이라도 완전히 다르고 싶습니다.
 
3월, 의 새로운 공간 ‘서울특별시 성동구 연무장길 1’에서 뵙겠습니다.
 

201902 #132

By EDITOR'S LETTER

London to Paris

 

내가 말했다.
‘우리 나중에 농사짓고 살자.’
그래, 그 목소리의 주체는 분명 나였다.
농사가 까닭 없는 투정은 아니다.
나는 평지가 좋고 멈추는게 좋고 그러면서 그 안에서 이야깃거리가 생기는 게 좋은 사람이다.
농사는 여기에 적격이다.
콩도 팥도 고추도, 그리고 넒은 의미에서 가축도 농사다.
소도 닭도, 닭과 비슷한 오리도 우리 함께 키워보자.
대신 인생의 마지막 10년만이다.
지금 한창인 너에게 설마 창살 있는 감옥을 농장으로 포장해서 주려고 하겠는가.
나는, 결코 트렌’디’하지, 않다.
평생 부모 세대가 말했던 그놈의 삐딱선을 타고 타다가 너를 만났다.
너라는 말이 참 예쁜 것은 너를 통해서 나를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뒤로 가는 것이 앞으로 가는 기차 자리 앉았다.
내가 무사하게 파리로 간다면 나는 텍스트를 보낼 것이다.
블루가 오렌지라고, 우리는 지나치게 선명하다고.
안심해라.
내가 가진 시간이 너보다 턱없이 부족함을 안다.
그럼에도 자신 있는 것은 주변의 소소한 것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예민해야 먹고사는 시대 아니던가.
고맙다, 이번에도.
나는 당분간 턱을 곧고 사물을 보련다. 뭣이 됐든 그 모양으로 내 DNA를 투영하겠다.

라프 시몬스의 텍사스발 퓨쳐리즘을 이해하기엔 캘빈 클라인 너무 뉴욕이었다.

“처절하게 희생해야 해. 그래야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쳐다봐 줄 거야.”
내 가치가 너를 만나 꽃을 피어 서양으로 가련다.
나는 꽃에 취했고, 글에 취했고, 읽히지 않는 말로 적힌 화이트 와인의 상표에 취했다.

파리다.
아직 평지 따위 흥얼거릴 때가 아니다.

201901 #131

By EDITOR'S LETTER

 

 

FUTURE SOCIETY

 

“지금 다른 생각하고 있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다. 누군가는 주의력 결핍이나 집중력 부족을 꼬집었지만, 나는 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현재를 살지만 현재를 살고 있지 않는다는 것.

쉽게 말하자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이 2018년 12월 15일 오후 6시를 갓 넘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분명 조금이라도 더 잘 쓰려고 나름 집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내 뇌와 심장, 모르겠다. 어찌 됐건 다른 기관들은 지금이 아니다.

어떤 것은 12월 17일 저녁에 있을 영국 본지와의 통화에 가 있고, 어떤 것은 12월 19일 저녁에 예약해둔 K-Pop 댄스 스쿨에 가 있다. 어떤 것은 2019년 1월 8일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심지어 어떤 것은 2020년 도쿄 올림픽에 가 있다. 못 믿겠지만 어떤 것은 2050년(상황까지 말하면 무서울까 봐 생략)에도 가 있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릴 때부터 별도의 노력을 통해서나 누가 시켜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등의 불편은 없다. 단지 내가 생각해도 정말 바쁠 경우, 상대가 눈치챌 수도 있다는 것. 여지없이 눈꼬리에 살짝 섭섭함을 담아 듣게 되는 말,

“지금 또 다른 생각하고 있지?”

첫 잡지사에서 일한 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아 편집장이 이렇게 말했다. “넌 참 잡지적인 사람이다.” 나는 이제야 그 말이 얼마나 놀라운 극찬인지 깨닫고 있다. 2018년에 2019년 1월호를 마감해야 하는 잡지의 성질과 절대적으로 미래지향적인 내 성향이 잘 맞는다는 것을 그 편집장이 알아차렸다는 이유만으로도 말이다.

내게 관심은 과거나 현재가 아니다. 미래다. 미래 사회다. 2019년의 나는, 또 는 미래에 관한 콘텐츠에 집중할 것이다. 1990년대생이 사회의 주 동력이 되고 있다. 미래를 미래로만 받아들인다면 지금 당신의 현재는 아주 먼 과거로 전락할 것이다. 미래가 곧 현재다. 따라서 갈피 없이 흔들리는 내 눈동자에 염려돼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초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지금 미래를 생각하고 있어.”

201812 #130

By EDITOR'S LETTER

 

 

다시 또 순수하게 엄마를 ‘엄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원래부터 가진 것이 없었으므로 더 이상 욕심낼 것도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 말간 민낯을 보며 만족할 날이 올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나를 닮은 아이를 보게 될 수 있을까.

내가 내 옷장을 정리하고, 거실 테이블의 먼지를 닦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경기도 양평의 집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출퇴근할 날이 올 수 있을까.

팀원들에게 조금 모자라 보이더라도 따뜻한 미소를 날리며 마감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내년에는 발로 썼다 한들 드라마 극본 공모전에 한 개라도 출품할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운동 비슷한 걸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술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로 줄일 수 있을까.

거의 30년 동안 응원하고 있는 여자 농구 팀이 올해는 프로 리그 첫 우승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믿고 있는 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잠시나마 키우던 강아지를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이틀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쉴 수 있을까.

다음 주부터 계속될 도쿄, 뉴욕, 런던 등의 출장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고질병인 인후염을 두 번은 더 겪지 않고 올겨울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정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생길 수 있을까.

다음 주 내로 곰팡이가 슨 이불과 베개를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을까.

지금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변함없이 행동으로 옮길 만한 용기를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배고픔 앞에서 차분할 수 있을까.

여동생 딸 ‘솔이’가 사춘기가 되더라도 인정받는 외삼촌이 될 수 있을까.

1년 안에 아빠에게 보고 싶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눈이 내리는 것을 진심으로 기다려볼 수 있을까.

내가 파운더founder가 된 패션 매거진을 전 세계에 파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소년의 몸이 될 수 있을까.

단 하나의 너에게 단 하나의 사람이라는 신뢰를 줄 수 있을까.

그래서 영원한 것도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함께 서양 어디에선가 첫 쇼를 할 수 있을까.

인터뷰를 할 수 있을까.

책을 낼 수 있을까.

아늑한 가게를 낼 수 있을까.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어떤 강 앞에서 백발의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깔깔거리며 같이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

2018년이라는 말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되는 이 먹먹한 순간을 2019년 이맘때는 먹먹하지 않게 맞이할 수 있을까.

나, 다 이럴 수 있을까.

201811 #129

By EDITOR'S LETTER

 

VISIBILITY

 

고등학생 시절 내 꿈은 VJ였다. 1995년 케이블 TV 채널 엠넷의 개국과 더불어 재키림, 최할리 등 1세대 VJ들이 브라운관을 채웠고, 그들은 내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케이블 TV는 팝스타들의 뮤직비디오에 힘입어 당시 가장 창조적인 미디어 플랫폼이었다. 말투와 태도는 물론 옷차림과 화장법까지, 이들이 우리에게 던진 화두는 ‘개성’이었다. 한마디로 눈에 띄어야 한다는 것. X세대라는 신조어와 더불어 ‘누네띠네’라는 아이스크림까지 히트 쳤을 정도로 어떻게든 도드라지는 차림을 하고 강남역을 누벼야 했다.

어느덧 케이블 TV가 올드 미디어로 꼽히게 된 요즘, 이제 유튜브와 소셜 네트워크로 대표되는 1인 미디어는 눈에 띄고자 하는 거리의 욕망을 디지털화했다. 이른바 가시성(Visibility). 시각적인 것에 가장 민감한 패션계는 너나없이 전투적으로 달려들었다. 가시성을 위한 도구도 진화했다. 1차원적이지만 가시성에 꽤나 효과적이었던 각양각색의 로고 플레이를 넘어, 바야흐로 올겨울의 핵심 키워드는 발광(發光)이다. 좀 더 포장해 말하면 고가시성 패션(High-Visibility Fashion).

미우치아 프라다는 고상한 캐시미어 코트를 버리고 미래 세계에 온 듯한 네온 컬러를 뿜어내고 있다. 어떻게 이런 색을 입혔는지 신기할 정도로 형광빛이다. 소방관이나 환경미화원이 안전을 위해 입는 반사 재킷은 준야 와타나베와 캘빈 클라인 205W39NYC를 비롯한 일류 브랜드의 애정을 받으며 도버 스트리트 마켓 등 편집매장의 윈도를 장식하고 있다. 그 핵심 소재인 3M 스카치라이트는 리플렉티브(reflective) 패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옷뿐 아니라 가방, 신발 가릴 것 없이 완벽한 원톱 주인공이다. 느닷없이 패션계의 안전 제일주의가 실현된 셈이다.

브랜드의 수장이 바뀔 경우 가시성 높은 이벤트는 당연시된다. 버버리는 홍콩의 이층버스, 서울의 플래그십 매장, 런던의 블랙 캡 등을 리카르도 티시가 만든 새로운 버버리 로고로 감싸는 독창적인 포장 마케팅으로 현실과 디지털 세계에서 모두 화제를 모았다. 역시 새로운 광고 캠페인과 로고를 전 세계 곳곳의 벽마다 포스터로 붙이며 에디 슬리만을 환영한 셀린느 역시 마찬가지다.

패션 매거진의 경우 커버의 가시성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스크롤을 멈추게 할 만한 도발적이고 매력적인 글과 그래픽을 위해 전부를 건다. 2종 커버는 예삿일이며, 맞다. 이달 는 제호부터 번쩍인다.

A.I가 먹거리 광고를 제작하고, 가상 인플루언서 누누리(Noonoouri)가 디올의 새로운 립스틱 모델이 됐다. 2019년을 눈앞에 둔 지금 어떻게 진정성 있고 미래적인 가시성을 쟁취하느냐는 숙제를 넘어선 숙명이다.

이달 는 디지털 에디터 2명과 뷰티 에디터 1명, 피처와 아트 디자인을 넘나드는 에디터 1명 등 총 4명의 새 얼굴을 충원했다. 예측이 불가능한 까마득한 디지털 세계, 우리가 가는 길을 여러분이 잘 식별할 수 있도록, 뿌연 시계(視界)를 맑고 푸르게 걷어내기 위해서.

201810 #128

By EDITOR'S LETTER

 

리얼리티

몇 년 전 <진실게임>이라는 프로그램이 꽤 잘나갔습니다. 구성은 간단합니다.

가짜가 진짜를 연기하는 가운데 누가 진짜인지를 찾는 게임입니다. 대상은 연예인의 친척이거나 기네스북 등재자,

때로는 누가 남자이고 누가 여자인지를 맞히기도 했습니다. 조금 허술해 보이는 진짜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훈련된 가짜를 마치 탐정이라도 된 양 찾아내는 쾌감이 주는 오락성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모창을 잘하는 가짜 중에서 진짜 가수를 찾는 <히든싱어>처럼 진화를 거듭하며 여전히 대중에게 통하는 소스가 되고 있으니까요.

“차라리 팔로어 수를 좀 사세요.”

근래 가장 자주 듣는 말입니다. 쇼핑으로 모든 스트레스를 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제가 유독 사고 싶지 않은 것, 바로 디지털이라는 무형의 공간에서 숫자를 늘리기 위해 사야 한다는 매거진 SNS의 팔로어 수입니다. 거의 20여 년을 패션계에서 동고동락한 지인이 “그래도 브랜드에서는 숫자를 중요시해. 티도 안 나는데 뭐 그리 뻣뻣하게 굴어?”라는 타박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현재의 시스템에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매거진 커버에 형광 색깔 로고를 박느라 돈을 쓰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니까요.

그러다 3일 전 우연히 본 한 게시물을 통해 정신을 차려봅니다. 요즘 잘나간다는 공간에서 젊은 디자이너의 티셔츠를 입고 9월호 <데이즈드>를 두 손 가득 투명 봉지에 담아 들어 올린 사진 한 장이 담긴 인스타그램의 포스팅. 진짜는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이니까요. 최근 3년여간 하이패션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브랜드는 베트멍입니다. 그들은 논란과 이슈 사이를 교묘히 오가며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바이럴 피스를 양산할 줄 알았고, 금기시되던 기존 브랜드의 로고를 과감한 협업을 통해 재창조해냈습니다. 한마디로 ‘왜 안 돼?’ 정신이랄까요. 베트멍이 협업하면 죽어가던 브랜드도 살아났습니다. 물론 베트멍이 선택한 브랜드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신발이든 티셔츠든 심지어 택배 회사든 자신만의 오리지낼러티를 지닐 것. 그들이 양산한 또 하나의 혁신은 모델 캐스팅입니다. 개성 있는 보통 사람을 런웨이와 캠페인 모델로 적극 활용한 것입니다. 네, 과거 마르지엘라도 그리했듯이요.

헤어와 메이크업을 바꿔가며 옷에 따라 연기하는 톱 모델의 시대를 넘어 적재적소 이미지에 맞는 사람을 쓰는 캐스팅의 혁신은 베트멍만이 아닌 디지털 시대 패션 브랜드 전체의 새로운 세계관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의 가치가 뜨면 다양한 어젠더를 지닌 또 다른 세력이 출현하기 마련입니다. 포스트 베트멍 시대의 양상은 안개처럼 자욱한 미래의 패션계에 누가 어떤 콘텐츠로 승리를 움켜쥘지 마냥 흥미진진한, 춘추전국시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야흐로 ‘DAZED’하고 ‘CONFUSED’합니다. 멍하고 혼란스러우며 분명치 않습니다.

<데이즈드> 한국판 역시 혼돈의 시기,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월간지의 기존 셈법을 무시한 채 다양한 실험을 곁들여 게릴라식으로 책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10월호, 실제가 주는 가치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서로의 사촌도, 연인의 키스도, 갓 스물이 된 친구 사이도 모두 실제고 진짜입니다. 진실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가짜는 패션계에도, 디지털 세계에도, 감히 여러분의 삶에도 없음을 믿(고 싶)습니다.

201809 #126

By EDITOR'S LETTER

 

안동 외가에 가면 MBC 를 볼 수 있었다. 언젠가 의 톰 크루즈가 나왔는데 외사촌 누나가
소리를 꽥 질러 깼다. ‘낮에는 박남정한테도 그러더만.’ 초등학생이던 나는 당연히 이불 속에 숨어 몰래 봤다. 기억나는 건 톰 크루즈가웃통을 벗고 꽉 끼는 청바지를 입었는데, 그 사타구니를 유독 강조하는 장면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바지가 끼는 것이구나.’또 언젠가 안동 그 TV 방에서 외사촌 누나의 괴성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속 톰 크루즈였다. 어느덧 고3이 된 누나는 연신 화면 속 톰 크루즈의 얼굴을 닦고 또 닦아댔다. “멋있어, 캡이야, 캡숑이야.” 나는 누나가 감전되지 않길 떨며 기도했다.

훗날 알았지만, 미국식 청춘 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는 톰 크루즈가 나오는 이 두 영화는 공교롭게도 모두 토니 스콧 감독이 연출했다.1980년대 내가 그 에서 본 톰 크루즈는 20대였고, 토니 스콧은 30대였다.

스물네 살짜리와 함께 이창동 감독의 을 보고 좀 먹먹했다. 60대 중반의 감독과 그보다 다섯 살이 더 많은 60대 후반의 원작자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는 청춘이 1990년대 중반에 태어난 요즘 20대에게 닿기엔 멀어 보였다(스물네 살짜리의 말과 표정은 더 적나라했다). 허기와 굶주림, 동경과 갈증, 빈부의 격차에서 오는 진보적인 시선의 연민, 그리고 무언가 순수를 찾아 헤매는 성장통의 아름다움···. 사실 이건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내 시대 청춘의 이념들이었다. 만약 내가 스물네 살 때 마흔 살짜리 삼촌과 를 봤다면 같은 기분이었으려나.

요즘 청춘은 결코 동경하지 않는다. ‘사’자 들어가는 직업, 대기업의 명함과 이메일 주소, 각자의 동기부여 앞에서 무릎 꿇은 지 오래다. 진보적이라고도, 보수적이라고도 할 수 없다. 각각의 이슈에 대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취사 선택이 가능하다. 고로 이념이나 국가주의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반면 내 삶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인 원초적인 배경과 터전에 대한 연민 따위야 내 자존감을 형성하는 데 거추장스러운 망상에 불과하다. 누구의 지원 없이 제프 베이조스나 마크 저커버그가 될 수‘도’ 있다.

래리 클락이 쉰두 살에 만든 가 20여 년이 지나 그의 나이 일흔한 살에 만든 보다 억만 배는 더
‘청춘’이었음을 감출 수는 없다.

뭐, 안다.
곧 내 차례다.

“나는 이제 일은 뒤로 가 있어. 다 젊은 친구들이 하고 있지. 나보다 훨씬 창조적이고 유능해. 는 그래야 하고.”
작년, 의 창립자인 제퍼슨 핵이 나를 보자마자 내 나이를 물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유스 컬처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황홀한 까닭은 바로 ‘때’가 있어서다.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순간이 주는 고귀함.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