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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202109 #170

By EDITOR'S LETTER

초등학교 5학년 때 첫 가출을 했습니다.
이유는 제가 가장 아끼던 보물을 아버지가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건 다름 아닌 제가 신문을 볼 수 있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꾸준히 모아온 여자 농구 신문기사 스크랩이 담긴 30권 남짓의 스케치북이었습니다.
박정숙, 조문주, 이강희, 박현숙 선수 등이 활약한 국민은행 여자 농구단의 팬이었으나 그와 라이벌이던 성정아, 최경희 선수 등이 뛴 동방생명(현 삼성생명)부터 한국화장품, 상업은행 등 모든 여자 농구 팀의 경기를 빼놓지 않고 보았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니까 경기에 대한 기사는 오로지 다음 날 새벽 집으로 배송되는 신문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 매일 아침 아버지보다 빨리 일어나 맨발로 현관문을 살짝 열고는 신문을 옆에 끼고 신이 나서 제 방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곤 서둘러 농구 기사를 찾아 꼼꼼히 읽은 뒤 정성껏 가위로 잘라 스케치북에 풀로 붙였죠.
행여나 선수들의 모습을 잘못 자를까 노심초사하면서 말입니다.
특히나 제가 좋아하는 선수의 사진이 크게 실리면 드래곤 볼이라도 모은 것처럼 그렇게 들뜨던 기억이 납니다.
이 스크랩북의 백미는 사진이나 기사마다 펜으로 일일이 써놓은 저만의 분석 메모였습니다. 
승리와 패배 요인부터 각 선수별로 잘한 점, 잘못한 점을 마치 농구 전문가라도 된 양 하나씩 쭉 기록해뒀으니까요.
매일 아침 한 시간 정도 누리던 그 행복한 여정의 마지막 행동은 농구 기사가 잘려 나간 신문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아버지 방에 갖다 두는 것이었습니다.
집이 풍족하지 못해 제대로 된 로봇이나 게임기 하나 없던 형편에서 체조나 농구 선수가 되고 싶어 하던 어린 아들의 유일한 취미였던 그 스크랩북을 왜 내다 버리셨는지 사실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를 듣긴 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그 당시 제가 겪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가늠조차 안 됩니다.
기억에 또렷이 남는 것은 제 울음이 파도가 되고 바다가 됐던 것.
목청이 찢어져라 울다가 그 화와 설움이 멈추질 않아 집을 나갔던 것.
그리고 아버지가 이 일을 만회한다고 수원으로 날 데려가 현대와 한일합섬의 여자 배구 경기를 보여준 것.
그 경기장 맨 뒷줄에 앉아 까마득하게 내려다보던 선수들의 서브와 스파이크 장면, 관중석을 빼곡히 메운 응원의 함성과 그 울림.
그 경기가 3:2로 끝났는데 어느 팀이 이겼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전 지경희 선수를 응원했죠.
아버지는 아마도 농구장은 집에서 너무 멀어 제가 농구 다음으로 좋아하던 배구 경기가 열리는 곳으로 데려간 걸로 기억합니다. 
네, 이것이 제 인생 첫 번째 가출이자 첫 번째로 직관한 스포츠 경기에 대한 기록이며 더불어 사랑하는 것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느끼게 해준 첫 번째 이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전 스포츠 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그만한 체력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커서 꼭 부자가 돼 농구, 배구를 비롯한 스포츠 경기를 직관하는 것을 꿈꾸던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스포츠 캐스터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이런 제게 4년마다 열리는 동·하계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은 가장 큰 축복이고 축제였습니다.
언젠가 좀 더 큰 TV로 스포츠 경기를 볼 테다,부터 언젠가 꼭 개막식에 가볼 테다, 언젠가 꼭 올림픽을 직접 보고 말 테다,까지의 꿈을 꾸던.

노심초사 오매불망 기다리고 기다리던 2020 도쿄 올림픽이 막을 내렸습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1년이나 연기됐고, 여전히 관중도 없는 운동장에서 뛰던 선수들의 피땀, 눈물을 보면서 전 다시 스포츠 선수를 꿈꾸던 어린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어찌나 기쁘던지요. 어찌나 감격스럽던지요.

그리고 이달 <데이즈드>에는 도쿄 올림픽을 통해 세계 4위라는 숭고한 기록을 세운 여자 배구 정지윤 선수와 다이빙 우하람 선수, 기계체조 류성현 선수를 담았습니다. 또 올림픽 최종 예선에서 아깝게 떨어졌지만 제가 그토록 좋아하던 성정아 선수의 아들인 동시에 현재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NBA에 가장 근접해 있는 농구 선수 이현중도 만났습니다. 

행복합니다. <데이즈드>는 스포츠와 스포츠인에 대한 존엄을 저희만의 미학으로 계속해서 응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게 된 지금 제 스스로에게 약속합니다. 다시는 스포츠를 향한 저만의 스크랩북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 8월 24일부터 9월 5일까지 도쿄 패럴림픽이 이어집니다. 인간의 한계를 감동의 드라마로 풀어내는 스포츠는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우리 같이 응원해요. 

202108 #169

By EDITOR'S LETTER

 터널이 기네요.
아무렇지 않은 듯 의기양양 기세 좋게 마냥 그렇게는 안 되네요.
함정에 빠져요.
누굴 원망해서 뭐 해요.
결국 따지고 보면 제 스스로 쳐놓은 함정이에요.
가만 있으면 없었을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자꾸 벌이니까 이렇게 돼요.
터널이 끝날 줄 몰라요.

좀 편하게 살아도 될 텐데, 어쩌겠어요.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라 그게 안 되는 운명인 거예요.
너무 원망스러워요. 진심이에요.
괴롭고 지치고 불안하고 안절부절못하고,
멈추지 못하니 체력도 정신도 해지고 문드러졌어요.

7월 초, 뜻하지 않게 확진자 접촉으로
2주간 격리 시간을 갖게 됐어요.
괴롭고 답답하고 힘들 줄 알았는데
하루이틀 지나니 웬걸요.

이 시간이 없었으면 큰일 났겠다 싶은,
제가 절 오롯이 볼 수 있던,
아마도 열아홉 도쿄에서 전단지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후 
2주간의 육체적 멈춤은 처음이 아니었나 싶은, 
물론 손으로 입으로 일이란 건 해야 했지만요.
그 시간이 어찌나 아늑하고 황홀하던지요.

갇혀서야 비로소 느낀 살아 있음.

그 기간 동안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랜만에 책 선물을 받고 알았는데요. 

그 냄새요.

왜 확진되면 후각을 잃는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선물 받은 그 책으로 제 후각을 시험하면서 알았는데요.

네, 책을 읽을 힘은 없었고요.

책마다 냄새가 하나같이 다르더라고요.

네, 하물며 책도 이리 다른데, 그렇다면 전 대충 이렇게 다른 냄새겠더라고요.

202107 #168

By EDITOR'S LETTER

444
결국 444페이지짜리 7월호.

여름 호러 무비 느낌의 444도 되고
<데이즈드> 많이 사달라는 애교와 아양의 사! 사! 사!도 되고
그래서 부끄러워진 샤샤샤shy shy shy도 되니까,
웃어요.
그럴게요.


울부짖음과 쥐어짜기
그러나 현실의 나는 미처 담지 못한 몇십 페이지까지 생각하며 밀려오는 자책감에 그야말로 울부짖으며 이 공간을 채우기 위해 뇌와 심장을 쥐어짜고 있다. 적당했어야 했나?


순수
눈앞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좇지 않고 상대의 장점을 보려고 하는 것.

고치고 싶었지만 알겠어, 고치지 않을게.
하나하나, 한 명 한 명에게 긴 애정을 가질게.


위로
나는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어요.

아무것도 모를 때니까 이런 말과 행동도 이럴 때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넘겨가며 때로는 네가 나를 향해 찌르는 칼도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꾹 참고 견뎠어요. 피가 철철 나는 순간에도 까짓것 내가 더 뭐라도 해주려고 노력했어요. 누군들 매일같이 쏟아내는 한참은 미숙한(내가 보기엔요) 아우성을 일일이 다 들어가며 답하기가 쉬운 줄 아세요? 혼이 탈탈 털리는데 마냥 행복하기만 하겠어요? 대체 누군들.
나도 사람이거늘, 한낱.
이젠 저도 위로받고 싶어요.
저도, 여러분, 네? 여러분.
위로해주세요.
주는 거 말고 저도 좀 받고 싶어요.
대체 어떤 것이든 좀 따뜻한 걸로.
모자라도, 별로라도, 가짜라도, 그 누구더라도.


유서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지닌 내 그릇보다 가진 것이 많아졌다는 거다. 안다.
차오르다 못해 넘쳐흐른다.
잘 알고 있다.
공증을 받은 유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에서는 뭐 서른 살부터 남기기도 하는데요.” 자연스러운 거라며 변호사가 안심시켜준다.
뭘 가지고 있지? 누구에게 줘야 하지?
이것도 생각이었다. 일이었다.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


5월 7일~6월 2일
<데이즈드> 아트 페어와 퓨처 소사이어티 쇼룸과 함께한 팝업 스토어를 보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주신 모든 분,
족히 1만 명은 넘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더현대 서울, 고마워요. 당신이 품은 혁신적 메시지가 있어요. 잃지 마세요. 단 한 명에게도 RSVP를 제대로 못 했는데도 찾아와주신 업계의 모든 분,
고마워요. 덕분에 제가 존재합니다.

참여해주신 전 세계의 아티스트 여러분,
패션 디자이너 여러분, 고마워요.
정말 많이 배웠어요. 한 분 한 분 눈 감아도 생각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방문해주고 독려해주신, 곱씹어봐도 나눈 대화 하나하나가 예술 그 자체였던 육준서 님과 백화점 내 샘플 세일이라는 무모할 만큼 독창적인 제 제안에 자신의 사옥에서 진행하려던 샘플 세일을 포기하고 현장에서 몇 날 며칠 고생하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혜미를 비롯한 잉크EENK 팀, 더 오래 생각날 거예요.
함께한 퓨처 소사이어티 쇼룸과 호스팅 하우스, 블루 프로젝트 팀 그리고 세일즈 열심히 한 모델들, 제가 뱉은 말을 주워 담느라 늘 고생인 우리 렉스트림 팀, 모두 고마워요. 술은 제가 정신을 회복하면 살게요.
그리고 지드래곤.
근 한시간 반 가까이 머물며 제 어설픈 설명 하나하나 다 들어가며 당신이 얼마나 아트를 사랑하는지 늘 그렇듯 되레 배운 시간이었어요. 생각해보니 샴페인 한 잔은커녕 맥주 한 병, 물 한 모금 못 줬네요. 제가 늘 그렇죠, 뭐. 고맙고 존경해요. 내년에도 이런 날이 올까요?
어찌 보면 부모와 마찬가지인 <데이즈드> UK에서 내년에는 아트 페어를 함께 해보면 어떻겠냐는 이메일을 보내주긴 했으니, 고맙게도요.
어떻게 보면 일이 커질 수도요.

네, 늘 그랬듯이 말이에요.

202106 #167

By EDITOR'S LETTER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할래요.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할래요.
그동안 왜 그랬나 몰라요.
숨기고 살았어요.
외로웠어요.

전 아름답고 싶어요.
전 아름다운 걸 탐닉해요.
고백조차 아름답고자 했나 봐요.
그럴 여력도 없으면서.

안 그럴래요.
이젠 툭 이럴래요.
좋아해요.
사랑해요.

태도를
눈빛을
그림을
이야기를
배려를
유연함을
열정을
순수함을
박애를
희생을
그리고
절 향한 동정과 애정을.

<데이즈드>는 언제나 젊고 기발하며 희망이 가득한 <데이즈드> 팀원을 통해 보여져야 해요.
전 이 부분에서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써요.
전성기라는 것이 있잖아요.
제가 이 플랫폼과 함께하는 전성기는 얼마 남지 않았을 거예요.
저도, <데이즈드>도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해야 해요.

얼마나 고맙고 좋은지 몰라요.
제 전성기를 함께해주는 팀원들이 친구들이 독자들이 아티스트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요.

고백할래요.

더 끊임없이.
나와 함께한 이 시간.
나의 의지를 공유하는 이 순간.
함께하고 있는 모든 여러분을 향해.

좋아해요.

사랑해요.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고백에는 헤플 테지만 그거까진 부끄러우니 접어둬요.

그저 싱긋, 아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아요.

+

<데이즈드> 아트 페어를 통해 기회라는 단어를 배웠어요.
전 세계의 젊은 작가가 보여주는 기회, 전 세계의 친구들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그것을 보는 기회,
그게 얼마나 근사하고 절실한 일인지 직접 경험을 통해 깨달았어요. 이 놀라운 가치를 선물해주신 모두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전해요.
5월 19일부터 6월 2일까지 더현대 서울 지하 2층 아이코닉존에 또 오세요. 이젠 제대로 고백할게요.

202105 #166

By EDITOR'S LETTER

제 책상 오른편에는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친필 사인이 담긴 ‘캠벨 수프 통조림’ 그림이 있어요. 제 휴대폰 속 케이옥션 앱에는 막 대니얼 아샴Daniel Arsham이 디올 맨의 킴 존스와 함께 만든 협업 제품 중 하나인 동그란 벽시계가 추정가 2200만~3500만원으로 표시된 채 업로드돼 있어요. 제 맞은편 옷장 위에는 2년 전 겨울, <데이즈드> 1층 팝업 공간에 전시했던 발렌시아가의 비주얼로 콜라주한 조 웹Joe Webb의 작품 하나가 올려져 있어요. 제 왼편 창을 뚫고 지나가면 모델 최소라의 파트너인 아티스트 코베가 찍은 최소라의 사진이 있고, 그 옆에는 이동기 작가의 아토마우스 그림 중 ‘샘’이란 작품이 있어요. 제 정면 입구에는 티보 에렘Thibaud Hérem의 작품 중 하나이자 제 학창 시절 별명이기도 한 ‘잉어’가 있고, 그 밑에는 몇 해 전 런던 멀티숍 브라운스에서 구입한 재기 발랄한 그라피티 아티스트 네온 세비지Neon Savage의 작품이 있어요. 이 친구는 브라운스의 벽면에 낙서를 하고 도망갔는데, 브라운스 대표가 그 낙서에 반해 수소문 끝에 이 친구를 찾아냈고, 그 덕분에 지금과 같은 아티스트가 되었다는 후일담이 있어요.
버질 아블로가 협업한 바카라의 머그잔과 브라운의 탁상시계도 자리 잡고 있죠.
지난주에는 지인들을 만나 세계 예술 시장에 합류한 NFT, 즉 대체 불가능 토큰(Non-Fungible Token)에 대해 각자 열변을 토하기도 했죠.

그런데 대체 아트가 뭐죠?
그게 대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거죠?
여러분은 아직 아트가 어렵고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나요?
한 번쯤 갖고 놀고 즐겨보고 싶은가요?

<데이즈드>는 열세 살을 맞아 전 세계 신진 아티스트와 <데이즈드> 아트 페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오는 5월 5일부터 <데이즈드> 1층 팝업 공간인 퓨처 소사이어티에서 먼저 선보인 후 요즘 가장 뜨겁다는 더현대 서울 지하 2층 바로 그 MZ 존에서 2주간 아트 페어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더현대 서울과 함께하는 팝업 스토어에서는 퓨처 소사이어티 쇼룸과 함께 전도유망한 패션 디자이너의 의류도 만날 수 있습니다. 
아트 페어의 취지에 걸맞게 모든 작품은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전 한마디로 아트 맥시멀리스트입니다. 아트가 넘치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 저와 <데이즈드>는 새로운 아티스트를 소개함과 더불어 예술 시장의 저변을 지속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답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아트는 결국 ‘시작’이니까요.

202104 #165

By EDITOR'S LETTER

런던에서 돌아오니 난세가 됐는데 빛이 보이지 않았다. 당초 계획이 모두 흐트러지니 갈등은 깊어지고 내 앞가림조차 힘들었다.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그만둘까 생각한 건 수천 번이 넘었다. 지난봄부터 올봄까지 8평짜리 원룸에서 지독하게 부딪혔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져, 옷이 좋아야 다음을 약속할 수 있다고 했다.

주름은 펴지지 않았을 때 주름이다. 주름일 때야 그 사이가 마치 골이라도 난 듯 보이지만 펴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태연하다. 순식간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길 바랐다. 시간은 생각보다 더디게 갔다. 무언가 될 수 있을까. 무언가 완성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이렇다는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알기 쉽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

배움의 시간은 예외 없이 인고를 동반한다. 깨우친 것은 옷을 대하는 태도와 이에 성의를 다하는 열정이었다. 그것은 어떤 숭고한 진실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그간 잊었다기보다 알고 있었지만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쯤이었다. 변명할 여지없이 내 스스로에게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이었다. 차라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낫지, 타자를 통해 내 믿음과 선택을 증명받기는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내 손에서 장미를 피게 하려면 손바닥 전체를 후벼 팔 가시를 가득 움켜쥐어야 가능한 것.

멀티가 돼야 한다고 그렇게 떠들더니 결국 인터컴 헤드셋까지 뒤집어썼다. 그러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덜컥 쇼가 시작될 거다. 내 역할은 아, 모두 다였다. 쇼는 12시, 14시 30분, 17시, 19시 30분 총 네 번이었다. 하늘과 맞닿은 펜트하우스가 선물한 자연광은 해가 뜨고 짐에 따라 옷과 옷을 보고 있는 마음과 생각이 천차만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이래서 쇼는 시간이 중요하구나. 배움은 여지없이 계속된다.

마지막 쇼의 중간 무렵 기어이 석양이 통창을 뚫고 서울과 나를 동시에 비췄다. 아주 무겁고 뜨거운 어떤 것이 폭발하듯 밀려왔다. 세 차례 정도 격정의 고비를 극복하자 피날레가 이어졌다.

무서워요, 내가.

이제 나의 쇼를 할 차례가 왔다. 이 봄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

202104 #164

By EDITOR'S LETTER

구보즈카 요스케Yōsuke Kubozuka는 10대 중반부터 줄곧 내 롤모델이었다.
그의 사진을 수집하려 당시 명동에만 있던 일본 서적 
판매점에서 매달 <맨즈 논노> 잡지를 사 모으며 현재 패션 잡지를 하는 사람이 됐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가 입은 옷을 따라 만들려 의상학과에 입학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열아홉 살에 200만원을 들고 무작정 그가 살고 있는 도쿄로 유학까지 갔다.

도쿄에는 형편이 어려운 나도 살 수 있을 정도로 중고 서점이 잘돼 있는 덕분에 그의 사진이 담긴 패션 잡지는 꽤나 구입했지만, 그가 나온 드라마를 보기는 힘들었다. 오로지 그가 무슨 옷을 입고 움직이는지 봐야겠다는 일념으로 구석구석 길거리를 뒤지면서 누군가 버린 비디오테이프도 넣을 수 있는 도시바의 TV를 한 대 주웠다. 2000년 봄, 딱 이맘때 날씨였던 그날이 잊히지 않는다. TV를 켜니 나온 그의 모습, 드라마의 이름하여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당시 나도 이케부쿠로에 살았는데, 이 또한 필연이라 믿었다.

그의 말을 알아듣고 싶어 열심히 일본어를 공부했고, 그가 입은 옷은 아니더라도 저렴하게 나온 비슷한 디자인의 것이라도 사기 위해 아침 6시부터 신주쿠 서구의 높은 빌딩 꼭대기에 있던 한 레스토랑에서 쥐들과 싸워가며 청소했다. 저녁에는 ‘후쿠신’이라는 라면 체인점의 ‘스무 살 주방장’으로 불리며 뜨거운 화로 앞에서 청춘을 불태웠고, 수업이 없는 날이면 도쿄 방방곡곡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아가며 수천 장씩 전단지도 돌렸다. 말이 좀 트여 조금 나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겼지만, 이 또한 신주쿠 번화가에 있는 술집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수건을 빨고, 점장이 먹고 싶다 하면 가끔씩 달걀 프라이를 부쳐주는 게 다였다. 해외에 가면 한국 사람은 믿지 말라던가. 하필 제일 힘들었던 청소 용역업체 사장이 한국 사람이었는데, 1년여 일해 번 800만원 남짓한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기억은 어제 일보다 선명하다.

월세와 학비, 쌀값을 대고도 돈이 남으면 자전거를 끌고 하라주쿠로 갔다. 2주에 한 번씩 주말에는 요요기 공원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 들렀다가 하라주쿠로 향했다. 주머니 안에는 언제나 잡지 등에서 오린 구보즈카 요스케의 사진이 있었다. 그의 옷과 헤어스타일, 그가 다닌다는 피부 관리실, 그가 광고로 출연한 개츠비 왁스, 하나하나 탐닉했다. 풍족히 먹을 돈도 없었지만, 그처럼 깡마르고 싶어 56kg까지 감량했다. 그런 몸에 그를 따라 드레드 펌까지 했을 땐 다들 뱀 같다고 했다.

어렴풋이 바랐던 것 같다. 언젠가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그의 스타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당신이 내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줬는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의 존재를 다시 자각하게 된 것은 마치 그가 나온 잡지 사진 한 장을 낡은 서점 귀퉁이에서 처음 본 과거만큼이나 정말 지극히 우연히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발견하게 된 것에서부터다. 지난달 이 무렵이었다. 그날 그는 자신의 계정에서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었다. 보니 술도 마시는 것 같았다. 과거와 달리 한없이 촉촉, 아니 축축한 눈빛으로 집 같은 실내에서 긴장감 없는 말투를 섞어가며 술 마시는 그의 모습을 휴대폰으로 넋 놓고 보다 보니 온갖 감정이 몰려왔다. 나를 보는 건지,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인 건지,
아니 이 사람, 대체 뭐지? 뭐였지? 내게.

그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아 라이브 방송 보기를 멈추고 그의 계정에 올린 사진을 찬찬히 내려봤다. 이 역시 몇 장 보다 쉽지 않음을 깨닫고 멈췄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기분이지?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사람의 나이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뿔싸, 찾아보니 내가 빠른 생이기는 하나 학번이 같은, 그러니까 동갑내기와 다름없었다. 그가 1995년도에 데뷔했으니 나는 줄곧 한참은 연배가 위라고 생각했던 터라 순간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내가 그토록 따라 하고 싶던 당신은, ‘너’였구나.

어젠가, 구보즈카 요스케의 인스타그램에 그의 가족사진이 올라왔다. 갭GAP의 모델로 온 가족이 등장해 촬영한 것으로 보였다. 그의 아내, 아들딸, 누가 봐도 예쁜 가족. 그의 아들인 구보즈카 아이루는 2003년생으로 최근 모델로 데뷔했다.

최근 나는 많은 것을 샀고, 많은 것을 분실했으며, 구보즈카 요스케를 다시 떠올렸다. 나의 구보즈카 요스케는 그가 만든 것이 아닌 내가 선택한 것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나는 왜 지금에야 알게 됐을까. 다행히 아직 내겐 반 이상의 시간이 남았다. 
구보즈카 요스케는 내 롤모델이다

202103 #163

By EDITOR'S LETTER

제겐 십수 년째 매일 만나는, 오래된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2007년 여름, 태국 방콕의 친구를 통해 구입한 손목시계입니다.
이 시계는 카시오 제품으로, 스와로브스키와 협업해서 일본 도쿄의 멀티숍 러블레스Loveless에서 한정판으로 소량 발매된 것입니다. 이 시계를 일본에서 구입한 태국 친구가 자신이 더 이상 착용하지 않는 소장품을 한데 모아 작은 가게 같은 것을 열었는데, 그곳에 딱 그 시계가 있었습니다.

보자마자 한눈에 매료됐습니다. 블랙 고무 소재에 반짝반짝 빛나는 스와로브스키를 장식한 디자인은 제가 늘 꿈꾸던, 저항 정신 가득한 소년의 기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와 상반되는 적당한 크기의 사각 프레임은 지적이고 안정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디자인별로
한두 개밖에 없는 거라고 말을 더하는데, 희소성 있는 나만의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문제는 가격이었죠. 구입 당시에는 200만원이 넘었지만 본인이 몇 번 차기도 했고, 중고이니 약 3만 바트, 그러니까 100만원 정도로 책정된 가격표가 떡하니 붙어 있었습니다. 남성지 패션 에디터였던 제 월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습니다. 삐걱삐걱, 나무 바닥 갈라지는 소리가 울리도록 그 좁은 가게를 그 시계를 차고 왔다 갔다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한국에서 같이 간 두 형은 “딱 네 거야. 그냥 네 거야. 이거 정말 못 구하는 거 알지?” 연신 반복했죠. 저축이나 노후 준비에 도움되는 관계는 지금껏 아니니까요.

목이 마르고 속이 타 들어갔습니다. 현기증마저 일 무렵 시계를 찬 채 거울 앞에 서 있는 제 눈에 뭔가 ‘번쩍’했습니다. 태국의 서슬 퍼런 여름 태양 빛이 창을 뚫고 들어와 시계 다이얼을 스치듯 지나가며 거울에 반사돼 순간적으로 손목에서 빛이 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것은 시계가 아니었습니다. 슈퍼맨이 슈퍼맨이 되게 하는 쫄쫄이 유니폼이고, 아이언맨이 아이언맨이 되게 하는 슈트와도 같았습니다. 네가 한없이 여리고 약한 나를 지켜줄 수 있겠구나. 나를 한없이 강하고 멋지게 변신시켜줄 수 있겠구나.

안 되겠습니다.
사야만 합니다.
수완나품 공항을 거쳐 서울의 집까지 가져가야 합니다.

아직까지는 그 시계 주인인, 친구와 흥정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갖고 온 옷 중에 그가 탐낼 만한 것도 생각해봅니다. 이 친구가 다음에 서울에 왔을 때 대접할 만한 식당도 떠올려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고, 두 형의 떠들썩한 조력도 함께했습니다. 20여 분 후 제가 갖고 있던 여행 경비 전액인 60만원 정도로 그 시계를 들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시계는 지난 15년간, 저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 하나였습니다. 처음 5년 차까지는 “시계 정말 예뻐요. 카시오에서 이런 것도 나와요? 역시···, 어디서 이런 디자인을 샀어요?” 아무래도 이색적인 디자인과 관련한 호평이 쏟아졌습니다. 2015년도를 넘어가자 이런 디자인의 시계는 많아졌고, 이런 호평은 잦아들었습니다. 대신 “와, 아직도 이 시계를 차고 있네요. 10년 전에도 본 거 같은데 잃어버리지도 않으시고요.” 뭔가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눈 친구를 대하듯 말해줍니다. 이 시계로 누군가에게 제가 기억되는 것이 마냥 행복했습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입니다.
수십 번 분실해도 마치 발이 달린 듯 다시 찾아오던 분신 같던 이 시계가 한두 달 전부터 끔찍하게 미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집에 두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펑펑 시계를 앞에 두고 울기도 했습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유는 그저 이 시계에 저를 가둬두는 것이 슬퍼졌다고 할까요. 왜 나는 그때 거기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지 안타깝다고나 할까요. 이제 더 이상 20대 초반의 내가 아닌데 소년 타령하는 것이 고독하다고나 할까요. 세월과 현실이 주는 한없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변화 앞에서 무기력한 저 자신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요즘 저는 매일 밤 모바일 서핑으로 시계를 찾습니다.
새로운, 지금의 저를 대변할 만한, 제가 사랑할 수 있는.

불안합니다.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만족할 만한 일과가 아닙니다.

다시 찾아가보라고 하면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만큼 구석진 방콕의 한 낡은 상가 건물의 좁디좁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 만난 그 작은 가게에서 바로 그 시계를 만났습니다. 더웠고, 어렸고, 궁핍했습니다. 혹시 꿈이었을까요?

이 이야기에는 결론이 없습니다.
현실은 과정일 뿐입니다.

202103 #162

By EDITOR'S LETTER

4년 전쯤 로에베와 자신의 레이블을 디렉팅하는 패션 디자이너 조나단 앤더슨을 대면 인터뷰했다. 당시 나는 그의 팬을 자처하는 막내 에디터를 현장에 내보냈다. 위풍당당하게 인터뷰를 위해 떠난 그가 돌아오자마자 한마디 내뱉었다. “앤드로지너스androgynous란 말은 뺄 걸 그랬어요.”
순간 아차, 싶었다. 말해 뭐 하겠는가.
사전에 인터뷰 질문을 꼼꼼히 체크하지 못한 내 불찰이었다.

“그런 말은 쓰는 게 아니라면서, 여러모로 달가워하지 않더라고요.”
앤드로지너스, 성별의 경계를 허무는 스타일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곤 하지만 이는 여자와 남자의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하는 말이다. 유럽에서는 1980년대에나 썼다. 이 말을 하는 순간 스스로 분리주의자가 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였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지는 뼈아픈 기억이다.

상징, 기호 등으로 모두가 동등하게 연결된 지금의 세계에서 무언가를 나누는 것만큼 시대착오적 발상은 없을 것이다. 여성과 남성은 가장 원초적인 예일 것이고, 재미와 진정성은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예일 것이다. 심장과 머리, 육체와 정신, 인간과 기계 모두 마찬가지다. 분리해서 볼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곧 모두가 연결됐다는 의미다. 팬데믹 상황에 처해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디지털계의 지배를 받게 된 요즘은 더하다.

반분리주의, 이 개념이 가장 각광받는 곳은 대립보다는 서로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의 이해를 추구하는 패션계다. 21세기 이전에는 주로 성별이나 신분의 경계를 논했다면, 2000년대를 넘어오면서 리얼 웨이와 런웨이, 데이 룩과 나이트 룩 등 TPO 부분에서 활발한 논쟁을 불러왔다. 그리고 2010년대 유용성과 럭셔리 혹은 스트리트와 하이패션이라는 서로 모순되던 개념이 통합되면서 반분리주의의 가치가 비로소 패션계의 필수불가결한 덕목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2020년대 초반을 보내고 있는 요즘 우리에겐 다시 코로나19로 인해 인종적 이슈가 부각되기도 했지만 결국 인간과 로봇 혹은 아바타, 현실과 가상이 패션을 비롯한 전체적인 우리의 가치관에 분리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시기가 될 것임은 확실하다.

이달 <데이즈드> 커버를 장식한 아바타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에스파와 하드웨어라는 개념을 진취적으로 도입한 매튜 M. 윌리엄스Matthew M. Williams의 지방시 모두 이러한 면에서 가장 뾰족하게 반분리주의 이념을 실천하고 있는 크리에이터라 볼 수 있다.

다시 봄, 다시 3월, 정확히 1년 전에는 파리 패션위크에 있었다.
그것이 기약할 수 없게 된 마지막 오프라인 패션위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시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 이런 발상조차 구식이거늘. 온라인과 오프라인, 현재와 미래, 서울과 파리, 심지어 마감 시즌과 비마감 시즌, 이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
무경계, 초연결, 그리고 비분리주의의 시대.
나는 이제 그 무엇도 분리하고 싶지 않으며, 분리할 수 없(게 됐)다.

202102 #161

By EDITOR'S LETTER

태어나는 순간이 많은 것을 결정한다.

엄마는 1월 8일부터 엄청난 산통을 느꼈다. 그러고는 60여 시간이 넘는 사투 끝에 태어난 날과 시각의 숫자를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1월 10일 낮 1시 10분에 나를 낳았다.  첫아이기도 했지만 유독 더 힘들었던 까닭은 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태어날 당시 몸무게가 4.5kg으로 시흥 병원 역사의 우량 신생아 기록을 갈아치웠으며, 출산 전 담당 의사가 엄마에게 쌍둥이일 거라고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온갖 고초를 겪은 엄마는 실신했고, 나는 첫 울음을 터트리지도 못한 채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 엄마는 지금도 내가 태어났던 즈음이 되면 며칠씩 꼭 몸살을 앓는다. 나는 내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원인 불명의 폐소공포증을 지닌 채 니트나 터틀넥처럼 몸에 달라붙는 옷은 입지 못하게 됐는데 다수의 의사가 말하길, 태어날 때 인큐베이터 안에 있던 것이 원인일 수 있다고 했다.

한 편의 전쟁과도 같았을 나를 출산할 당시 엄마는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 사실 그때 엄마는 고통의 시간을 단축시킬 방법을 알고 있었다. 수차례 의사가 물었다. “위험할 수 있으니 인공분만을 하는 게 어떨지요?” 엄마는 단호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을 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있는 힘껏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연분만을 고집했다. 의학 기술이 요즘 같지 않던 시절, 어린 엄마는 그것만이 나를 지킬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군. 믿기 힘들겠지만 그렇게 태어난 나의 첫 별명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넓은 어깨와 비범한 
몸무게를 지닌 나를 경기도 고천의 이웃부터 버스 안내양까지 모두 장군이라 불렀다. 돌 때는 서너 살, 서너 살 무렵에는 초등학생이라 생각할 정도로 몸집이 컸다. 엄마는 그 별명을 무척이나 흡족해했다. 죽을 고생해 낳은 자식이 장군이라 불리니 그나마 뭔가 위로받는 느낌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때부터 살면서, 왜 누구나 있겠지만 정말 모두 놓고 싶은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나는 나를 낳을 당시의 엄마를 떠올린다. 이것은 나를 잡아주는 데 꽤나 큰 효과가 있다. 새해가 됐고, 여지없이 내가 태어난 날도 찾아왔다. 어릴 때는 엄마가 아픈 게 싫어 생일이 다가오는 게 무섭기까지 했다. 문득 이런저런 잔상을 되새겨보니 이젠 엄마가 아픈 내 생일이 될 수 있는 한 오래 계속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2001년생부터 2005년생까지 만으로 치면 아직 모두가 10대인 친구들이 빼곡히 담긴 2월호 커버를 보고 있자니 실로 새 시대가 됐음을 실감한다. 나의 10대 또한 바로 어제 같거늘, 새 시대라는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데이즈드> 편집장으로서 나 자신이 마치 남처럼 아득히 느껴진다. 창밖에는 누구도 모를 그때처럼 다시 눈이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