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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202104 #165

By EDITOR'S LETTER

런던에서 돌아오니 난세가 됐는데 빛이 보이지 않았다. 당초 계획이 모두 흐트러지니 갈등은 깊어지고 내 앞가림조차 힘들었다.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그만둘까 생각한 건 수천 번이 넘었다. 지난봄부터 올봄까지 8평짜리 원룸에서 지독하게 부딪혔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져, 옷이 좋아야 다음을 약속할 수 있다고 했다.

주름은 펴지지 않았을 때 주름이다. 주름일 때야 그 사이가 마치 골이라도 난 듯 보이지만 펴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태연하다. 순식간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길 바랐다. 시간은 생각보다 더디게 갔다. 무언가 될 수 있을까. 무언가 완성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이렇다는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알기 쉽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

배움의 시간은 예외 없이 인고를 동반한다. 깨우친 것은 옷을 대하는 태도와 이에 성의를 다하는 열정이었다. 그것은 어떤 숭고한 진실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그간 잊었다기보다 알고 있었지만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쯤이었다. 변명할 여지없이 내 스스로에게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이었다. 차라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낫지, 타자를 통해 내 믿음과 선택을 증명받기는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내 손에서 장미를 피게 하려면 손바닥 전체를 후벼 팔 가시를 가득 움켜쥐어야 가능한 것.

멀티가 돼야 한다고 그렇게 떠들더니 결국 인터컴 헤드셋까지 뒤집어썼다. 그러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덜컥 쇼가 시작될 거다. 내 역할은 아, 모두 다였다. 쇼는 12시, 14시 30분, 17시, 19시 30분 총 네 번이었다. 하늘과 맞닿은 펜트하우스가 선물한 자연광은 해가 뜨고 짐에 따라 옷과 옷을 보고 있는 마음과 생각이 천차만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이래서 쇼는 시간이 중요하구나. 배움은 여지없이 계속된다.

마지막 쇼의 중간 무렵 기어이 석양이 통창을 뚫고 서울과 나를 동시에 비췄다. 아주 무겁고 뜨거운 어떤 것이 폭발하듯 밀려왔다. 세 차례 정도 격정의 고비를 극복하자 피날레가 이어졌다.

무서워요, 내가.

이제 나의 쇼를 할 차례가 왔다. 이 봄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

202104 #164

By EDITOR'S LETTER

구보즈카 요스케Yōsuke Kubozuka는 10대 중반부터 줄곧 내 롤모델이었다.
그의 사진을 수집하려 당시 명동에만 있던 일본 서적 
판매점에서 매달 <맨즈 논노> 잡지를 사 모으며 현재 패션 잡지를 하는 사람이 됐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가 입은 옷을 따라 만들려 의상학과에 입학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열아홉 살에 200만원을 들고 무작정 그가 살고 있는 도쿄로 유학까지 갔다.

도쿄에는 형편이 어려운 나도 살 수 있을 정도로 중고 서점이 잘돼 있는 덕분에 그의 사진이 담긴 패션 잡지는 꽤나 구입했지만, 그가 나온 드라마를 보기는 힘들었다. 오로지 그가 무슨 옷을 입고 움직이는지 봐야겠다는 일념으로 구석구석 길거리를 뒤지면서 누군가 버린 비디오테이프도 넣을 수 있는 도시바의 TV를 한 대 주웠다. 2000년 봄, 딱 이맘때 날씨였던 그날이 잊히지 않는다. TV를 켜니 나온 그의 모습, 드라마의 이름하여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당시 나도 이케부쿠로에 살았는데, 이 또한 필연이라 믿었다.

그의 말을 알아듣고 싶어 열심히 일본어를 공부했고, 그가 입은 옷은 아니더라도 저렴하게 나온 비슷한 디자인의 것이라도 사기 위해 아침 6시부터 신주쿠 서구의 높은 빌딩 꼭대기에 있던 한 레스토랑에서 쥐들과 싸워가며 청소했다. 저녁에는 ‘후쿠신’이라는 라면 체인점의 ‘스무 살 주방장’으로 불리며 뜨거운 화로 앞에서 청춘을 불태웠고, 수업이 없는 날이면 도쿄 방방곡곡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아가며 수천 장씩 전단지도 돌렸다. 말이 좀 트여 조금 나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겼지만, 이 또한 신주쿠 번화가에 있는 술집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수건을 빨고, 점장이 먹고 싶다 하면 가끔씩 달걀 프라이를 부쳐주는 게 다였다. 해외에 가면 한국 사람은 믿지 말라던가. 하필 제일 힘들었던 청소 용역업체 사장이 한국 사람이었는데, 1년여 일해 번 800만원 남짓한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기억은 어제 일보다 선명하다.

월세와 학비, 쌀값을 대고도 돈이 남으면 자전거를 끌고 하라주쿠로 갔다. 2주에 한 번씩 주말에는 요요기 공원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 들렀다가 하라주쿠로 향했다. 주머니 안에는 언제나 잡지 등에서 오린 구보즈카 요스케의 사진이 있었다. 그의 옷과 헤어스타일, 그가 다닌다는 피부 관리실, 그가 광고로 출연한 개츠비 왁스, 하나하나 탐닉했다. 풍족히 먹을 돈도 없었지만, 그처럼 깡마르고 싶어 56kg까지 감량했다. 그런 몸에 그를 따라 드레드 펌까지 했을 땐 다들 뱀 같다고 했다.

어렴풋이 바랐던 것 같다. 언젠가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그의 스타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당신이 내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줬는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의 존재를 다시 자각하게 된 것은 마치 그가 나온 잡지 사진 한 장을 낡은 서점 귀퉁이에서 처음 본 과거만큼이나 정말 지극히 우연히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발견하게 된 것에서부터다. 지난달 이 무렵이었다. 그날 그는 자신의 계정에서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었다. 보니 술도 마시는 것 같았다. 과거와 달리 한없이 촉촉, 아니 축축한 눈빛으로 집 같은 실내에서 긴장감 없는 말투를 섞어가며 술 마시는 그의 모습을 휴대폰으로 넋 놓고 보다 보니 온갖 감정이 몰려왔다. 나를 보는 건지,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인 건지,
아니 이 사람, 대체 뭐지? 뭐였지? 내게.

그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아 라이브 방송 보기를 멈추고 그의 계정에 올린 사진을 찬찬히 내려봤다. 이 역시 몇 장 보다 쉽지 않음을 깨닫고 멈췄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기분이지?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사람의 나이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뿔싸, 찾아보니 내가 빠른 생이기는 하나 학번이 같은, 그러니까 동갑내기와 다름없었다. 그가 1995년도에 데뷔했으니 나는 줄곧 한참은 연배가 위라고 생각했던 터라 순간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내가 그토록 따라 하고 싶던 당신은, ‘너’였구나.

어젠가, 구보즈카 요스케의 인스타그램에 그의 가족사진이 올라왔다. 갭GAP의 모델로 온 가족이 등장해 촬영한 것으로 보였다. 그의 아내, 아들딸, 누가 봐도 예쁜 가족. 그의 아들인 구보즈카 아이루는 2003년생으로 최근 모델로 데뷔했다.

최근 나는 많은 것을 샀고, 많은 것을 분실했으며, 구보즈카 요스케를 다시 떠올렸다. 나의 구보즈카 요스케는 그가 만든 것이 아닌 내가 선택한 것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나는 왜 지금에야 알게 됐을까. 다행히 아직 내겐 반 이상의 시간이 남았다. 
구보즈카 요스케는 내 롤모델이다

202103 #163

By EDITOR'S LETTER

제겐 십수 년째 매일 만나는, 오래된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2007년 여름, 태국 방콕의 친구를 통해 구입한 손목시계입니다.
이 시계는 카시오 제품으로, 스와로브스키와 협업해서 일본 도쿄의 멀티숍 러블레스Loveless에서 한정판으로 소량 발매된 것입니다. 이 시계를 일본에서 구입한 태국 친구가 자신이 더 이상 착용하지 않는 소장품을 한데 모아 작은 가게 같은 것을 열었는데, 그곳에 딱 그 시계가 있었습니다.

보자마자 한눈에 매료됐습니다. 블랙 고무 소재에 반짝반짝 빛나는 스와로브스키를 장식한 디자인은 제가 늘 꿈꾸던, 저항 정신 가득한 소년의 기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와 상반되는 적당한 크기의 사각 프레임은 지적이고 안정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디자인별로
한두 개밖에 없는 거라고 말을 더하는데, 희소성 있는 나만의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문제는 가격이었죠. 구입 당시에는 200만원이 넘었지만 본인이 몇 번 차기도 했고, 중고이니 약 3만 바트, 그러니까 100만원 정도로 책정된 가격표가 떡하니 붙어 있었습니다. 남성지 패션 에디터였던 제 월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습니다. 삐걱삐걱, 나무 바닥 갈라지는 소리가 울리도록 그 좁은 가게를 그 시계를 차고 왔다 갔다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한국에서 같이 간 두 형은 “딱 네 거야. 그냥 네 거야. 이거 정말 못 구하는 거 알지?” 연신 반복했죠. 저축이나 노후 준비에 도움되는 관계는 지금껏 아니니까요.

목이 마르고 속이 타 들어갔습니다. 현기증마저 일 무렵 시계를 찬 채 거울 앞에 서 있는 제 눈에 뭔가 ‘번쩍’했습니다. 태국의 서슬 퍼런 여름 태양 빛이 창을 뚫고 들어와 시계 다이얼을 스치듯 지나가며 거울에 반사돼 순간적으로 손목에서 빛이 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것은 시계가 아니었습니다. 슈퍼맨이 슈퍼맨이 되게 하는 쫄쫄이 유니폼이고, 아이언맨이 아이언맨이 되게 하는 슈트와도 같았습니다. 네가 한없이 여리고 약한 나를 지켜줄 수 있겠구나. 나를 한없이 강하고 멋지게 변신시켜줄 수 있겠구나.

안 되겠습니다.
사야만 합니다.
수완나품 공항을 거쳐 서울의 집까지 가져가야 합니다.

아직까지는 그 시계 주인인, 친구와 흥정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갖고 온 옷 중에 그가 탐낼 만한 것도 생각해봅니다. 이 친구가 다음에 서울에 왔을 때 대접할 만한 식당도 떠올려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고, 두 형의 떠들썩한 조력도 함께했습니다. 20여 분 후 제가 갖고 있던 여행 경비 전액인 60만원 정도로 그 시계를 들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시계는 지난 15년간, 저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 하나였습니다. 처음 5년 차까지는 “시계 정말 예뻐요. 카시오에서 이런 것도 나와요? 역시···, 어디서 이런 디자인을 샀어요?” 아무래도 이색적인 디자인과 관련한 호평이 쏟아졌습니다. 2015년도를 넘어가자 이런 디자인의 시계는 많아졌고, 이런 호평은 잦아들었습니다. 대신 “와, 아직도 이 시계를 차고 있네요. 10년 전에도 본 거 같은데 잃어버리지도 않으시고요.” 뭔가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눈 친구를 대하듯 말해줍니다. 이 시계로 누군가에게 제가 기억되는 것이 마냥 행복했습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입니다.
수십 번 분실해도 마치 발이 달린 듯 다시 찾아오던 분신 같던 이 시계가 한두 달 전부터 끔찍하게 미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집에 두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펑펑 시계를 앞에 두고 울기도 했습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유는 그저 이 시계에 저를 가둬두는 것이 슬퍼졌다고 할까요. 왜 나는 그때 거기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지 안타깝다고나 할까요. 이제 더 이상 20대 초반의 내가 아닌데 소년 타령하는 것이 고독하다고나 할까요. 세월과 현실이 주는 한없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변화 앞에서 무기력한 저 자신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요즘 저는 매일 밤 모바일 서핑으로 시계를 찾습니다.
새로운, 지금의 저를 대변할 만한, 제가 사랑할 수 있는.

불안합니다.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만족할 만한 일과가 아닙니다.

다시 찾아가보라고 하면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만큼 구석진 방콕의 한 낡은 상가 건물의 좁디좁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 만난 그 작은 가게에서 바로 그 시계를 만났습니다. 더웠고, 어렸고, 궁핍했습니다. 혹시 꿈이었을까요?

이 이야기에는 결론이 없습니다.
현실은 과정일 뿐입니다.

202103 #162

By EDITOR'S LETTER

4년 전쯤 로에베와 자신의 레이블을 디렉팅하는 패션 디자이너 조나단 앤더슨을 대면 인터뷰했다. 당시 나는 그의 팬을 자처하는 막내 에디터를 현장에 내보냈다. 위풍당당하게 인터뷰를 위해 떠난 그가 돌아오자마자 한마디 내뱉었다. “앤드로지너스androgynous란 말은 뺄 걸 그랬어요.”
순간 아차, 싶었다. 말해 뭐 하겠는가.
사전에 인터뷰 질문을 꼼꼼히 체크하지 못한 내 불찰이었다.

“그런 말은 쓰는 게 아니라면서, 여러모로 달가워하지 않더라고요.”
앤드로지너스, 성별의 경계를 허무는 스타일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곤 하지만 이는 여자와 남자의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하는 말이다. 유럽에서는 1980년대에나 썼다. 이 말을 하는 순간 스스로 분리주의자가 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였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지는 뼈아픈 기억이다.

상징, 기호 등으로 모두가 동등하게 연결된 지금의 세계에서 무언가를 나누는 것만큼 시대착오적 발상은 없을 것이다. 여성과 남성은 가장 원초적인 예일 것이고, 재미와 진정성은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예일 것이다. 심장과 머리, 육체와 정신, 인간과 기계 모두 마찬가지다. 분리해서 볼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곧 모두가 연결됐다는 의미다. 팬데믹 상황에 처해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디지털계의 지배를 받게 된 요즘은 더하다.

반분리주의, 이 개념이 가장 각광받는 곳은 대립보다는 서로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의 이해를 추구하는 패션계다. 21세기 이전에는 주로 성별이나 신분의 경계를 논했다면, 2000년대를 넘어오면서 리얼 웨이와 런웨이, 데이 룩과 나이트 룩 등 TPO 부분에서 활발한 논쟁을 불러왔다. 그리고 2010년대 유용성과 럭셔리 혹은 스트리트와 하이패션이라는 서로 모순되던 개념이 통합되면서 반분리주의의 가치가 비로소 패션계의 필수불가결한 덕목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2020년대 초반을 보내고 있는 요즘 우리에겐 다시 코로나19로 인해 인종적 이슈가 부각되기도 했지만 결국 인간과 로봇 혹은 아바타, 현실과 가상이 패션을 비롯한 전체적인 우리의 가치관에 분리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시기가 될 것임은 확실하다.

이달 <데이즈드> 커버를 장식한 아바타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에스파와 하드웨어라는 개념을 진취적으로 도입한 매튜 M. 윌리엄스Matthew M. Williams의 지방시 모두 이러한 면에서 가장 뾰족하게 반분리주의 이념을 실천하고 있는 크리에이터라 볼 수 있다.

다시 봄, 다시 3월, 정확히 1년 전에는 파리 패션위크에 있었다.
그것이 기약할 수 없게 된 마지막 오프라인 패션위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시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 이런 발상조차 구식이거늘. 온라인과 오프라인, 현재와 미래, 서울과 파리, 심지어 마감 시즌과 비마감 시즌, 이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
무경계, 초연결, 그리고 비분리주의의 시대.
나는 이제 그 무엇도 분리하고 싶지 않으며, 분리할 수 없(게 됐)다.

202102 #161

By EDITOR'S LETTER

태어나는 순간이 많은 것을 결정한다.

엄마는 1월 8일부터 엄청난 산통을 느꼈다. 그러고는 60여 시간이 넘는 사투 끝에 태어난 날과 시각의 숫자를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1월 10일 낮 1시 10분에 나를 낳았다.  첫아이기도 했지만 유독 더 힘들었던 까닭은 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태어날 당시 몸무게가 4.5kg으로 시흥 병원 역사의 우량 신생아 기록을 갈아치웠으며, 출산 전 담당 의사가 엄마에게 쌍둥이일 거라고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온갖 고초를 겪은 엄마는 실신했고, 나는 첫 울음을 터트리지도 못한 채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 엄마는 지금도 내가 태어났던 즈음이 되면 며칠씩 꼭 몸살을 앓는다. 나는 내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원인 불명의 폐소공포증을 지닌 채 니트나 터틀넥처럼 몸에 달라붙는 옷은 입지 못하게 됐는데 다수의 의사가 말하길, 태어날 때 인큐베이터 안에 있던 것이 원인일 수 있다고 했다.

한 편의 전쟁과도 같았을 나를 출산할 당시 엄마는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 사실 그때 엄마는 고통의 시간을 단축시킬 방법을 알고 있었다. 수차례 의사가 물었다. “위험할 수 있으니 인공분만을 하는 게 어떨지요?” 엄마는 단호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을 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있는 힘껏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연분만을 고집했다. 의학 기술이 요즘 같지 않던 시절, 어린 엄마는 그것만이 나를 지킬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군. 믿기 힘들겠지만 그렇게 태어난 나의 첫 별명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넓은 어깨와 비범한 
몸무게를 지닌 나를 경기도 고천의 이웃부터 버스 안내양까지 모두 장군이라 불렀다. 돌 때는 서너 살, 서너 살 무렵에는 초등학생이라 생각할 정도로 몸집이 컸다. 엄마는 그 별명을 무척이나 흡족해했다. 죽을 고생해 낳은 자식이 장군이라 불리니 그나마 뭔가 위로받는 느낌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때부터 살면서, 왜 누구나 있겠지만 정말 모두 놓고 싶은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나는 나를 낳을 당시의 엄마를 떠올린다. 이것은 나를 잡아주는 데 꽤나 큰 효과가 있다. 새해가 됐고, 여지없이 내가 태어난 날도 찾아왔다. 어릴 때는 엄마가 아픈 게 싫어 생일이 다가오는 게 무섭기까지 했다. 문득 이런저런 잔상을 되새겨보니 이젠 엄마가 아픈 내 생일이 될 수 있는 한 오래 계속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2001년생부터 2005년생까지 만으로 치면 아직 모두가 10대인 친구들이 빼곡히 담긴 2월호 커버를 보고 있자니 실로 새 시대가 됐음을 실감한다. 나의 10대 또한 바로 어제 같거늘, 새 시대라는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데이즈드> 편집장으로서 나 자신이 마치 남처럼 아득히 느껴진다. 창밖에는 누구도 모를 그때처럼 다시 눈이 내리고 있다

202101 #160

By EDITOR'S LETTER

스무 살 초반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이사를 많이 다녔다.
첫 집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내 기억 속 첫 번째 집은 논현동 지하 단칸방이었다.
2004년인가 2005년이었는데 보증금 500에 월 30만원 정도 냈다.

일찌감치 패션지 에디터를 하고 있던 터라 출퇴근 시간이 워낙 불규칙했고, 그때는 정말 밤샘 업무가 많았으니까.
본가도 안양인 데다 그놈의 폐소공포증 때문에 차멀미를 어찌나 했는지.
성격도 지랄 맞아서 다섯 살 때부터 방문을 잠가놓고 살았으니
일본에서부터 쭉 혼자 살아왔던 터다.

딱 이맘때였다.
크리스마스를 열흘인가 앞둔 12월 중순.
며칠 전부터 속이 메슥거리더니 현기증이 났다.
그런데 뭐, 그때나 지금이나 마감 또한 늘 이즈음.
아프다는 말을 하고 병원에 갈 배짱은 없었다.
핑 돌아가는 눈알을 움켜쥐고 간신히 1월호 마감을 털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집은 바깥보다 더 추웠는데, 퇴근하고 밤 12시에 보일러를 켜면 아침이나 돼야 바닥이 따뜻해졌다. 꽁꽁 언 몸을 이불 속에 처박고,
제대로 씻기나 했던가. 눈을 감고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를 꿈꿨다.

얼마 전에 산 홍승완의 보라색 벨벳 재킷을 입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 일마레의 봉골레 파스타 정도면 충분하겠지만 스테이크도 시켜보자.
끝나고는 에스 바에 가서 진토닉을 마시며 춤이라도 출까.
뭐, 정 안 되면 홍대도 괜찮아.
그런데 누구를 부르지? 누가 있더라, 내게.

형광등 속에 갇힌 벌레들을 보다가 TV 소리가 멀어지면서
스르르 눈이 감기는데···.

어라, 분명 보일러를 30℃에 맞춰놓고 잤는데, 이상하다. 깼는데도 여전히 뭔가 서늘한 기분.
보일러마저 고장인가.

불현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 크리스마스이브 계획에 있던 자 중 하나다.

“내가 신고했으니 망정이지. 죽을 뻔한 거 알지?”

죽을 뻔이라···. 열아홉 살에 도쿄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깨보니
4차선 교차로였는데 자칫하면 차에 치여 죽을 뻔했지.

“내가 너네 집 알고 있던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겨.”

맞아. 집들이 때 각 휴지 네 통을 들고 왔었지.
집과 휴지 격이 안 맞는다고 했던 말도 기억나.
그래, 그런데 어쩌다 내가 병원에 오게 된 거야?

“의사에게 물어봐.”

이틀의 시간이 지나고 깨어난 내가 파악한 정황은 아래와 같다.
마감이 끝나면 부리나케 연락하기 바빴던 내가 이틀간 연락이 닿지 않다가 휴대폰마저 꺼지자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이 수소문했고,
그중 한 친구가 집으로 찾아와 벨을 눌렀으나 밖에서 TV 소리는 들리는데 대답이 없는 게 꺼림칙해 열쇠집을 수소문해 문을 따고 들어온 것.
내 상태야 뭐, 예상 가능한, 의식을 잃은 채 실신.

당시 병명까지야 언급하지 않겠지만
쉽게 말해 속이 완전히 썩고 곪아 있었다.
검사와 치료보다 괴로웠던 것은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늘 그렇듯 가족에겐 알리지 않았다.
6인실이었던가, 8인실이었던가. 어르신들 틈바구니 병실에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만큼 애틋한 연정을 맺은 지인도 없었다.

고개를 창가 쪽으로 돌리고는 눈물을 훔치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노래하자~ 파라파팜팜 기쁜 구주 성탄 라팜팜팜
즐거운 노래로 라파팜팜 말구유 아기의 라파팜팜 라파팜팜 라파팜팜
라파팜팜 라파팜팜 라파팜팜 라파팜팜···.

2020년 12월,
그때 그 병실과도 비교조차 안 될 만큼
차디찬 이 한 해의 끝을 잡고 나는 노래를 부른다.
이번엔 읊조림이 아니다.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일 먼저 이를 닦자 윗니 아래 이 닦자

이게 다 뭐라고, 희망의 노래라도 불러보며 되새겨보니
아파서 죽을 뻔한 것은 죽을 뻔한 것도 아니었다.

2021년이 이렇게 온다.
뭐라 더 할 말이 없어 실컷 죽을 뻔했던 일을 토해냈다.

202012 #159

By EDITOR'S LETTER

“이젠 정말 한 줄도 못 쓰겠다. 이젠 정말 뭐가 좋은지도 모르겠다.”
퇴사한 후배에게 보냈다.
“왜요. 의식의 흐름대로 자동 기술, 이것이 선배의 탤런트 아니셨습니까.”
위로했다.
“내 협착증이 배와 등을 지나 뇌와 가슴까지 퍼진 듯해.”
호소했다.
“그러면 구구절절하지 않게, 겨울바람처럼 날카롭게 사진으로 대신하시지요.”
현명하다.
“그런데 요즘 도통 뭘 기록한 게 없네. 그럴 만한 것도 없었고. 아, 그러면 올해 커버 사진을 싹 붙여놓을까.” 제시했다.
“좋습니다.”
안심이다.
“너는 정말 내게 도움을 주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야.”
진심이다.

+
고맙습니다. 2021년에도 존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2011 #158

By EDITOR'S LETTER

‘상냥한데 참 할 말 다 하네.’

2020년 가을, 요즘을 장악하는 자세는 친절과 독립인 것 같습니다.
제 주변에 잘되고 있는 사람을 보면 다 이런 느낌을 가졌더라고요.
상반된 만큼 매력적이지만 막상 그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만은 않죠.
조금 빗나가면 되레 오해하기 십상이니까요.

과시하거나 못되게 굴지 말되 치근덕대지 말고 이성적이기.
아직 어렵다고요?
제가 좀 눈썰미가 좋아서 익혀봤는데요,
다음과 같이 연습해보세요.

첫 인사는 먼저 하세요.
상대의 나이나 직함을 따지거나 가늠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환하게 웃거나 오버해서 악수를 청할 필요는 결코 없습니다. 그저 맑게 “안녕하세요”. 요즘은 마스크에 뭐에
더욱 인사하거나 밍글링하기 쉽지 않고 예민한 상태잖아요. 먼저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큰 힘 들이지 않고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답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고 대답하세요.
상대의 말을 중간에 자르는 것은 늙었다는 방증이죠. 지루해도 경청하는 자세를 보이고 답을 하는 게 좋아요. 그런 사람은 다시 안 만나면 되잖아요?

어차피 안 맞는 사람에게 나쁜 인상을 주는 것보다 그게 더 현명해요.

카카오톡 등 모바일 메신저에서는 이모티콘 사용을 줄이고(아예 하지 않거나), 최대한 맞춤법에 맞게 대화하세요.
급하게 바로 대답한다고 해서 상대가 호감을 갖거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고요. 특히 모바일 메신저로 대화할 때는 템포의 주도권을 자기가 쥐어야 합니다.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가세요. 연인도 아닌데 이모티콘을 남발하면 좀 쉬워 보여요.
맞춤법을 지키며 지적으로 보이는 것이 대화를 끌어가기에 몇 배 더 유리해요.

농담하지 마세요.
예전에는 재미있는 사람이 비즈니스를 이끌었다면 요즘은 조금 반대인 것 같아요. 유머는 애인이나 가족, 친한 친구에게 하세요. 오히려 냉소적인 게 나아요.
사적인 이야기는 최대한 줄이고 일과 연관된 이야기로 대화를 풀어가세요. 너무 경직된 거 아니냐고요? 미소가 있잖아요.
말과 표정의 톤을 맑고 친절하게 유지하는 걸로도 충분해요.

‘원래’, ‘옛날에는’ 이런 말 쓰지 마세요.
이유는 말 안 해도 아시죠? ‘앞으로’, ‘이제부터’ 이런 표현을 주로 써서 미래지향적인 느낌을 주도록 하세요.

상대의 눈을 보세요.
쑥스러우면 이마쯤도 좋아요. 시선을 회피하는 것은 자신이 없다는 뜻이잖아요. 술잔을 부딪칠 때만 말고 대화할 때도

눈을 보는 것이 상대에게 오랫동안 좋은 인상을 갖게 해요.

자신만의 시그너처 룩을 만드세요.
이미지 시대예요. 단벌 신사가 유리하죠. 낡고 오래된 까만 후디라도 떠올릴 때 단번에 생각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해요. 그게 ‘친절’ 중 하나예요.

주어는 복수형을 쓰세요.
‘나는’, ‘저는’보다 ‘저희는’, ‘우리는’이라는 말을 쓰면 팀워크가 좋은 것 같아 보여 젊고 따뜻한 감성을 전달할 수 있어요. 특히 무언가 거절할 때 더 쿨해 보입니다.

“제가 지금 이런 이유로 이럴 사정이 안 돼서요”보다 “저희가 지금 이런 이유로 이럴 사정이 안 돼서요”라고 하면 더 여러 가지를 고려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물론 그 어떤 순간에도 표정은 친절하게요.

개인톡과 단톡을 잘 활용하세요.
이것은 대면 미팅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여럿이 있을 때와 일대일로 해야 할 이야기를 잘 구별해야 해요. 일종의 인내가 필요한 거죠.

그룹 미팅이나 단체 톡에서 한 개인에게 따로 더 해야 할 이야기는 반드시 별도로 하는 게 좋아요.
오프라인의 경우라면 헤어질 때 잠시 짬을 내달라고 부탁해 이야기를 더 하면 돼요.

좋은 감정은 절제해 표현하고 나쁜 감정은 결코 표현하지 마세요.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거죠. 어떤 순간에도 일관된 모습이 좋아요. 좋은 감정 중 특히 ‘고맙다’는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에요. 결코 성사되지 않을 상황에도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세련된 태도예요. 반대로 나쁜 감정은 그 어디에도 표현하지 마세요. 차라리 정말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에게 뒷담화하는 것이 현명해요.

10월 16일, 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보자면 그제부터 팝업 패션위크란 것을 시작했어요. 2회, 3회 지속될 수 있도록 잘하고 싶어요.

늘 그래왔듯, 쉬지 않고 저지를 거예요.
친절하고 독립적으로.

202010 #157

By EDITOR'S LETTER

서초구 반포, 한신아파트에 살던 외숙모가 어떤 존재였냐면요.
요즘 말로 딱 세련이랄까. 특유의 여유로움, 넉넉함, 온화함, 신뢰감.
그 외숙모가 깎아주는 복숭아의 맛은 뭐가 달라도 달랐고, 그 집에 있는 장난감 하나하나의 때깔도 남달랐더랬죠.

그런 외숙모가 어느 날 어머니에게 그럽디다. “아는 분에게 물어보니 애 이름이 좀 아니랍니다. 승훈이라고 부르면 좋대요.”
당시 외숙모는 그런 기운과 관련한 네트워크에 분명 일가견이 있으셨죠.
아니 그게 아니라도 무슨 이야기를 해도 믿음이 가던 외숙모의 말 한마디였으니 보통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들은 이야기지만 30년이 지난 오늘도 그 음성, 발음, 공기의 톤까지 똑똑하게 기억날 정도로 강렬했어요.
네, 제 인생을 바꿔놓은 순간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렇게 그 시절의 몇 년간 제 일기장을 살펴보면 표지에 적힌 ‘이승훈’이란 이름을 지금도 발견할 수 있죠.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잠시 잊고 있던 이름에 대한 트라우마는 성장하면서 외숙모 이야기의 진실을 좇는 저만의 탐구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막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던 시기, 몇몇 용하다는 분을 통해 여러 성명학적 논리에 의해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더욱 구체적인 사유와 함께 알게 되었죠.
특히 제 이름 가운데 글자인 솥귀 ‘현鉉’은 솥뚜껑이나 화살촉을 뜻하는데, 이름을 알릴 수도 있으나 구설에도 자주 오르는 풀이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면 마치 제 심장을 화살촉으로 후벼 파는 느낌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어머니 성씨를 더해 ‘이서현범’으로 명함을 파거나 영어 이름에서 현을 빼고 표기한 것도 다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행위였죠.

제게 개명은 늘 머리 한쪽에 남아 있는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 달여 전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인터넷 성명학 사이트에 접속하기 전까지는요.
3000원을 결제하고 제 이름 풀이를 보는데, 첫 줄에서부터 바로 이름을 바꾸라는 권유를 하더라고요.
그다음 구절은 줄줄이 어찌나…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그때 깨달았습니다.
마냥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머지 삶은 내 이름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개명을 위해 찾은 성명학 전문가 중 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름을 바꾼다는 게 과거 이름의 제가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돌려 다른 부분까지도 볼 수 있게 하는 거라고요.
삶을 더욱 폭넓게 바라볼 수 있다고요.

고심 끝에, 이겸이 됐습니다.
가운데에 무조건 ‘ㄱ’을 넣어야 한다는 한 선생의 조언이 좋았습니다.
마침 한 달여 전 존경하는 의 신광호 편집장이 제게 ‘A’라는 이니셜이 박힌 목걸이를 선물하시면서 더한 말이 떠오르더군요.
“네 이름엔 알파벳 ‘A’가 없더라고.”

맞아요. 전 ‘ㄱ’도, ‘A’도 없는 심지어 좋아하는 숫자도 ‘2’였던 그런 삶을 살았을 수도요.

오랜만에 부모님과 여동생 가족이 사는 세종시를 찾았습니다.
“겸아.”
그간 제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어머니가 가장 먼저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아버지도 기분 좋으시고요.

겸할 ‘겸兼’이란 한자 뜻처럼 포용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영어로는 Guiom이란 철자를 써서 표기하기로 했습니다.

많이 불러주세요.
저도 제 이름을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Call me by my name.
For the personal reason, I officially changed my name from Hyunbum(Bom) Lee to Guiom Lee.
Call me by my new name. Thanks.

이겸
李兼
Guiom Lee

202010 #156

By EDITOR'S LETTER

1. 움직이기 싫은 나날이다. 끔찍한 게 무엇인지 실로 체감하는 매일이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배울 것이 있다더니 몇 가지는 늘었다. 청결 습관과 배달 앱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기가 표면적
성장이라면, 정신적 성장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오프라인으로 만날 사람에 대한
가치를 묻게 된 것. 예전 같으면 돌아오는 토요일 저녁 식사 상대나 생일 파티 초대자 정도 돼야
고민하던 것을 매 순간 하고 산다. ‘이 사람, 굳이 오프라인에서도 만나야 해? 마스크 쓰고
위험 부담 감수하면서까지, 그럴 가치 있어?’ 피로는 쌓이고 기준은 못 찾았다. 말만 뻔질나게
했지 여전히 닥치는 대로다. 그래도 생각한다는 게 어디인가.
언젠가는 정교하고 현명한 기능을 갖춘 ‘만남 가치 필터’ 같은 게 장착되겠지.

2. 휴대폰만 보고 사는 멍청한 삶에서 유일한 안식처는 다름 아닌 이곳이다. 종이. 확실히
마음이 놓인다. 덜 쫓기는 기분이다. 좀 잘못 해도 까짓것, 용서받을 기분이다. 종이는 단칼에
무 자르듯 사람을 내치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어떤 일부만 보고 그 나머지마저 막 유추해
결정짓지 않을 거다. 그래서 좀 뻘짓거리할 요량으로 대충 좀 내용도 없는 글을 쓰면 또 어떤가.
종이가 안아준다면 그게 산문이고 수필이며 문학이 될지도 모른다.

3. 행복 중 하나가 휴대폰 메모장에 끄적거린 글을 컴퓨터 워드 파일에 옮겨 적는 행위다.
복사해서 붙여 넣어도 되지만 나는 그것을 키보드로 쳐서 옮겨 담는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치다 보면 마치 뇌와 심장이 한 번 더 작동하는 기분이다. 이런 글을 썼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데자뷔처럼 묘한 기시감마저 불러일으키는데, 꽤 중독성 있는
괜찮은 맛이다. 반대로 메모장에 쓴 내용이 별로 없을 때는 ‘최근 이리도 생각이 없었던가’
혹은 ‘뭐 하나 적을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온통 ‘숫자’만 생각하고 살았던가’, 안타깝다.

4. “너는 네 스스로 무덤을 파. 별것도 아닌데 늘 과장해서 생각해 더 아프고 더 외롭고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 너 자신을.” 나는 과장된 생각을 한다. 일부러라도 최대한 더 극적으로 나
자신을 몰고 간다. “좀 적당히 가자. 좀 놓고 갈 건 놓고 가자.” 그럴 수 없다. 그것은 날 죽이는
것이다. 생각을 과장해서 하는 것이야말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는 현세에서 유일하게 나를
구원하는 방법이다.

5.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싫어하는 것은 통화하는 것.

6. 요즘 몇몇의 꿈에 내가 등장했다. 과일을 사놓고 사라지기도 하고, 가족 모임에 마치
가족인 양 참석해 활짝 웃었다고도 한다.
일련의 일들이 예사롭지 않게 전개되고 있음을 느낀다.

+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개명을 준비 중이다. 무사히 잘 마치게 된다면 ‘이현범’이란
이름으로는(저 밑의 사인 포함) 아마 이것이 마지막 글이 될 거다.
고마웠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