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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 LOVE #204

By EDITOR'S LETTER

(나타날) 그대에게

우선 실망했어요.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요.
이렇게까지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정말 아니잖아요.
사람 탈을 쓴 건 맞죠?
그동안 그대를 찾으려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고 있었죠?
대신 그만큼 잘해줘야 해요.
아, 아니에요.
바라는 건 없어요.
그냥 나타나기만 해요.
정신과 육체, 더는 안 아프게 최대한 건강하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먼저 베를린에 같이 가요.
그렇게 좋다는데 스물여덟 살 때인가 가보곤 한 번도 못 가봤어요.
비행기에서는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도착해서는 관광객처럼 돌아다니기도 하고 클럽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어요.
서울로 돌아와서는 집 뒤 작은 숲에 난 산책로를 걸어요.
가볼까 하다가 그대가 오면 같이 가려고 미지의 세계로 남겨두고 있어요.
강아지든 고양이든 반려동물과 함께해도 좋아요.
단, 2년 계약인 집이니 늦지 않게 나타나요.
영화든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전시든 공연이든 뭐든 같이 보러도 다녀요.
혼자 가기 뻘쭘한 성격 탓에 못 보고 놓치는 게 많아요.
음악 축제가 그리 많던데 얼굴 타도 좋으니 하루 종일 서서 즐기며 스트레스도 날려요.
기회가 된다면 서로의 가족도 알뜰히 챙겨줘요.
같이 밥도 먹고 대화도 나누고 어릴 때부터 살아온 이야기도 나눠요.
제가 또 나름 어른들에겐 꽤 잘하는 성격이라 그대도 흡족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데이즈드> 러브 & 프러포즈 에디션을 같이 봐요.
남들의 사랑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도 어떻게 지내면 좋을지 그려봐요.
책에 나온 커플 아이템도 사고 가라는 곳도 가보고 하라는 것도 해봐요.
메이크업도 따라 해보고 언제가 될지 몰라도 결혼식도 꿈꿔 봐요.
원래 전 뭐든 커플로 함께하는 걸 참 좋아해요.
사실 그러려고 이 책도 만든 거예요.
흡연보다 더 빨리 늙는 원인이 외로움이라는데 외롭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타나요.
꿈에서라도 좋으니
꿈에서라도 괜찮으니
꿈에서라도.

P.S.
다 하기 싫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그대, 나타나기만 해요.

이겸
李兼
Guiom Lee

202309 #204

By EDITOR'S LETTER

안양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여자 같다고, 가난하다고 폄하하던 사람들로부터.

부단히 그때의 나를 지우려 애썼다.
마치 갑옷처럼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옷이라 믿으며.

옷으로 나를 투영하고
옷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옷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도쿄에서 머리를 노랗게 탈색하고 자전거를 탔다.
주중에는 라면을 만들고 주말에는 마사지 가게에서 수건을 빨았다.
낮에는 전단지를 돌리고 밤에는 웃음을 팔았다.
돈이 생기면 옷을 샀다.
안 먹고 안 마시고, 치장에만 애를 썼다.

서울로 돌아온 내게 엄마는 뱀 같다고 했다.
몸무게를 재니 56kg이었다.

내달렸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세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악문 입술에서 터져 나온 피를 모아 꿈을 채웠더니
주어진 시간은 막바지에 다다랐다.

집들이 온 동생의 딸이 버섯을 먹지 않는다.
“외삼촌은 버섯을 정말 좋아하는데.”
동생이 묻는다.
“오빠 어릴 때 버섯 정말 싫어했어. 얘도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잊고 있었다.
싫어하던 음식이 크면 좋아질 수 있구나.

좋아하던 옷이,
구역질과 함께 쏟아진다.

다시 노란 머리다.
자전거를 타고 도망칠 때다.

이겸
李兼
Guiom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