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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zedAuthor

202407 #215

By EDITOR'S LETTER

담임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갑자기 교실에 있는 우리 반 학생 50명 남짓의 눈빛이 빠르게 교환되기 시작한다.
사실은 몇 명,부터다. 나머지는 그들의 눈빛에 담긴 지시 내용을 파악하고 순종 혹은 복종하는 제스처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토록 일사불란할 수 있을까.
자리에서 한 명씩 일어서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괴기한, 누군가는 망측한 표정과 포즈를 취한다. 우리는 웃음을 참기에 여념 없다.
이것이 미션이다.
담임은 여전히 칠판에 무언가를 적느라 여념 없다.
이윽고 내 차례다.
스르륵 의자를 뒤로 빼고 자리에서 일어나 뭐라도 하려던 찰나,
휙, 담임이 뒤를 돈다.
아뿔싸, 걸렸다.
모든 것은 내가, 말 그대로 ‘덤터기’를 뒤집어쓰고 만다.

나는 운이 나쁜 애였다.

나나난나 나나나난나나 나나난나 나나나난나나
달려가는 여성시대~
방학이면 으레 아침부터 일어나 라디오를 틀었다.
목적은 하나였다.

사연이 담긴 편지를 써 보내 각종 경품을 받는 것, 받아내는 것, 고로 세간살이에 보탬이 되는 것.
초등학교 3학년이 어필할 수 있는 사연이라곤 별개 없었다. 먼저 엄마 이름부터 시작했다.
파란만장한 결혼 성공기부터 비련의 시댁살이, 자식과 남편 사이에 있던 깔깔 에피소드 등등등.
AM, FM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라디오 방송사에 그 톤 앤 매너를 맞춰 각각 다른 내용을 보냈다.
반자동 세탁기, 도서상품권, 동글이 청소기, 무선전화, 비디오 등등등.
사연이 채택돼 전파를 타고 집으로 경품이 도착하면 할수록 사연 아니 ’NO사연‘의 당사자인 엄마는 혀를 내둘렀다.
가장 쓸모없는 것은 주유권이었는데, 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유권은 교차로 신문, 물물교환 코너에 올려 팔았다.
엄마 이름이 방송사 한 바퀴쯤 돌고 난 후 아빠, 이모, 할머니, 여동생의 이름까지 번갈아 써가며 프라이팬부터 냉장고까지 마련했다.
집안의 복덩이였다.

나는 운이 좋은 애였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다이내믹한 일들을 몸소 겪은 후 비로소 깨달은 게 있다.
그건 다 운이 아니라 실력이었다.
담임 선생님에게 걸리지 않은 친구들은 나보다 몇 배는 더 재빠르되 조용히 앉았다 일어서고
배꼽 빠질 만한 포즈를 취할 줄 아는 민첩한 몸놀림을 갖췄다.
라디오에 온 가족 명의를 도용해 보낸 사연이 당첨돼 경품을 쏟아지게 받은 것 또한
날 때부터 스스로도 소름 끼치도록 능수능란한 거짓말을 갖춘 덕분이었다.

요즘 여럿 나를, 나의 과잉을, 나의 지나침을 염려한다.

지금 나는 운이 아닌 실력이 필요한 때다.

지혜롭게 대화할 줄 아는 포용력,
상대의 아픔과 고통, 나아가 그 결핍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력,
모두가 나 같지 않고, 나 같을 수 없으며, 나 같아서도 안 된다는 성찰력.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힘을 주소서.

계절도, 달력도, 여정도 벌써 반이 지났다.

 

이겸
李兼
Guiom Lee

202406 #214

By EDITOR'S LETTER

안녕하세요.
<데이즈드>는 열여섯 살을 맞아 <데이즈드>를 발행하는 렉스트림의 팀 체제와 구성, 문화 등 시스템 전반에 걸쳐 대대적 혁신을 단행합니다. 20여 년간 수많은 매거진과 업계를 직접 경험한 저는 최근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하고 있고, 디지털 역량이 세상을 뒤덮는 2024년, 기존 ‘에디터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발전도, 성장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지난 9년간 10~20대 유스 컬처를 대변하는 <데이즈드>를 만들며, 또 현재 <데이즈드>를 함께 만들고 있는 40명에 육박하는 20대 크루들과 함께 일하며 전통 시스템으로는 기회와 성장,
콘텐츠 제작 등 모든 면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통감했습니다. 한 명의 에디터가 단 하나의 파트만 담당하기에 지금의 젊은 에디터들은 더 넓고 깊게 성장하고자 하는 야망과 그것을 실현할 만한 역량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편집장’이 없는 에디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뉴 <데이즈드> 시스템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기존의 패션팀, 뷰티팀, 피처팀, 디지털팀, 아트팀 등 팀 구분을 폐지합니다.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설득의 3요소로 꼽은 이론인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라는 이름의 세 팀과 사진‧영상을 만드는 스렉SL’EX(스튜디오 렉스트림)까지 총 네 개 팀으로 운영합니다. 각 팀은 <데이즈드>에 대한 남다른 로열티를 가진 팀장과 부팀장 체제를 구축해 안정을 도모합니다. 클라이언트 여러분, 이에 따른 혼선으로 일에 차질이 생길까 하는 우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2번에서 이어집니다. 

2. 모든 에디터는 전공과 부전공 시스템으로 두 가지 영역을 넘나들며 콘텐츠를 제작합니다. 패션 & 뷰티, 뷰티 & 디지털, 디지털 & 피처, 피처 & 아트, 아트 & 워치, 워치 & 인터내셔널, 인터내셔널 & 프로젝트 등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 다중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기회를 골고루 제공합니다. 앞서 설명한 세 팀이 콘텐츠 제작 시 마치 하나의 서클처럼 유기적으로 순환하며 더욱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퀄리티 높은 콘텐츠 제작을 완수할 겁니다. 

3. 렉스트림 내 모든 호칭은 닉네임으로 합니다. 님, 씨, 선배, 후배··· 다양한 호칭 실험을 통해 장단점을 모두 파악한 저는, 이른바 닉네임(혹은 영어 이름)으로 운영하는 몇몇 회사가 지닌 좋은 면을 발견했습니다. 호칭의 캐릭터화, 단순화를 통해 사내에서 이뤄지는 어떤 프로젝트에도 더욱 민첩하게 대응이 가능하며, 특히 매일같이 이뤄지는 인터내셔널 마켓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더욱 능동적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데이즈드> ‘판권’에는 에디터의 원래 이름을 그대로 써두지만 <데이즈드>와 스렉의 이메일은 각자의 닉네임으로 통일합니다. 이제 우리 크루들을 만나시면 바론, 스쿠, 루시, 피비, 세라, 네오 등으로 간결하게 불러주셔도 좋습니다. 

4. 더불어 스렉(스튜디오 렉스트림)은 최근 중국, 말레이시아 국적 등 국가를 넘어 오로지 실력을 갖춘 다양한 크루가 합류해 아시아를 비롯한 인터내셔널한 마켓에서 압도적 크리에이티비티를 발휘할 예정입니다. 사진가 노아(Noah, 노승윤)도 합류해 영화, 뮤직비디오, 하이엔드 패션 필름 및 우리만의 젊고 개성 있는 숏폼과 유튜브 영상을 비롯해 사진, 3D, VFX, 그래픽, 스타일링 등 모든 장르에서 혁신적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 공을 들일 예정입니다. 

말이 길어져 죄송합니다. 제가 뭐 늘 그렇죠. 어쨌든 더 잘해보겠다, 이 말이 또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그간 여러분이 베풀어주신 <데이즈드>를 향한 사랑, 제가 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데이즈드>의 젊은 크루들과 전 세계 독자를 믿고 바라보며 오직 크리에이티비티! 오직 콘텐츠로만 승부하며 한 발 한 발 더 나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이겸
李兼
Guiom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