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관해 무엇이 좋고 나쁜지 말하기에는 아직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믿는 말은 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곧 우리가 부재하는 세상을 보는 것이다.” 분명어느 철학자의 말일 텐데, 나는 이 말을 벚꽃이 휘날리는 교정 중 가장 낡은 강의실에서 교수님의 입을 통해 들은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처음으로 영화를 보고영화를 배웠다. 영화가 뭔지 정말 몰라서 들은 수업이었다. 영화가 너무 좋아서, 영화를 너무 보고 싶어서 선택한 수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조금 그른선택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가끔 한다.
역시 교수님의 말을 통해, 스물두어 살의 내게 베르토프는 돌연 질문 하나를 던진다. “가시적 세계를 공격하기 위해 나의 카메라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가?” 브레송은 제기한다. “네가 보는 것과 다르게 보는 기계를 매개체로 네가 보는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쟁의 말에 따르면 영화는자연의 극작술이라는데, 영화를 직접 찍어보지 않아선가? 그 시절 나는 그 무수한 물음과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수업에서 내가 겨우 건진 것은어떤 장면들. 카메라가 포착해 낸 것들. 바람이 부는 초원, 연못에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 빗속을 걷는 한 무리의 행인, 공장에서 나오는 직공들, 건물 정면의열린 창문,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는 여인, 산을 통과하거나 역에 도착하는 기차 등등. 이들이 봄과 여름에 걸쳐 듣고 미더운 성적을 받았던 그 수업을 이토록오래 기억하는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나를 잡아 처음으로 이끌고 간 곳들.
그때 다큐멘터리 장르를 처음 알았다. 다큐멘터리는 지루했지만, 다큐멘터리가 가진 태도와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개중 요리스 이벤스Joris Ivens의<다리>(1928)와 <비>(1929)도 있었다. 특히 쨍한 여름날에 본 <비>는 나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암스테르담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펼쳐진 소낙비의서정적 세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불분명한 것을 분명한 것으로, 감춰진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비가 가진 생명력에 대해, 비와 빛에 대해, 도심 속웅덩이와 행인의 옷깃과 광장의 군중이 들고 있는 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