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zed Earthround

곧 봄이다. 계절이 바뀌기 전, 사람은 으레 무언가를 정리한다. 옷장을 비우거나, 관계를 정리하거나. 나도 그러는 편이다. 이 맥락에서는 뎀나도 비슷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또 한 번, 그가 모든 것을 지웠다. 지난 2026 봄/여름 데뷔 컬렉션을 앞두고 그랬듯, 이번 2026 가을/겨울 컬렉션을 앞두고도 인스타그램을 백지로.

‘프리마베라Primavera’. 이탈리아어로 봄, 라틴어에서 비롯된 ‘첫 번째 계절’. 생명력과 희망, 청춘을 상징하는 단어. 그리고 산드로 보치텔리Sandro Botticelli의 대표작. 프리마베라, 이 단어는 늘 시작을 약속하는 동시에 묘한 긴장을 남긴다. 무언가가 바뀔 것 같다는 기대와, 정말 바뀌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이 동시에 따라붙는 계절.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피드 위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AI로 생성된 이미지들. 비현실적으로 매끈한 장면들. 어딘가 익숙하지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풍경. 그리고 다시 소피아 로엔이 1966년 로마의 구찌 부티크에 서 있는 흑백 사진, 산드로 보치텔리의 비너스까지. 알고리즘이 만든 이미지와, 르네상스의 가장 완벽한 인간상이 같은 화면에. 어쩌면 도발. 아니면 티저? 쇼를 보고 나니 그게 이미 전부였다는 생각에 뎀나는 또 한 수를 내다봤구나 하고 피식 웃음이 새나온다.

밀라노에 도착한 날, 기분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뎀나의 구찌로부터 도착한 초대장. 제법 묵직한 검정색 박스였다. 이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열었는데, 의외로 덩그러니 한 장의 카드뿐이었다. 조금 허무했고, 동시에 더 궁금해졌다. 정신없이 패션위크 일정을 소화하던 중, 쇼 전날 밤 뎀나의 인스타그램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뎀나는 구찌를 단순한 메종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 하나의 형용사로 만들고 싶다고 썼다. 구찌를 한 사람처럼 묘사한 문장이 유난히 또렷했다. 거칠고, 모순적이며,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품은 존재.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타인을 놀라게 하고 스스로도 놀라고 싶어 하는 사람. 편지는 길었지만, 결국 말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더 가볍게, 더 부드럽게, 더 정교하게.

부푼 마음을 안고, 정신없이 쇼장으로 향했다. 뎀나는 자신의 컬렉션을 ‘첫’ 런웨이로 올릴 장소로 건축가 파올로 비티 비올리가 건축한 팔라초 델레 쉰틸레Palazzo delle Scintille를 택했다. 계단식 좌석 위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조각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어떠한 위압감. 하지만 이건 또 하나의 기믹. 멀리서 보면 완벽했고, 가까이 가면 전부 레플리카였다. 우피치와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작품을 스캔해 다시 만든 것들이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 AI 티저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데미무어, 도나엘라 베르사체, 닝닝, 박규영, 리노, 박재범 등 구찌의 과거와 현재를 향한 취재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 쇼장의 불이 꺼졌다. 니콜리니의 ‘Sopratutto’가 스타카토처럼 울려 퍼졌고, 조명이 켜지며 단 한 줄의 런웨이가 드러났다. 내 심장도 덩달아 리듬에 맞춰 쿵쿵쿵. 첫 룩. 화이트 호지어리 패브릭의 심리스 미니드레스. 얇고 유연한 패브릭이 피부 위에서 거의 사라지듯 이어진다. 봉제선은 지워지고, 가장자리는 열로 마감되어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군더더기를 걷어낸 채 신체의 곡선을 따라 밀착되는 절제된 관능. 타이트한 블랙 슬랙스, 얇은 로고 벨트, 시어한 패브릭, 보이지 않는 마감. 1995, 1996, 1997년의 구찌를 통과해온 감각이지만, 복제라기보다는 재해석에 가깝도록. 이어진 테일러링은 이지하고 유동적이었다. 같은 재킷을 스커트, 레깅스 팬츠, 트라우저와 겹쳐 입히는 식. 로우컷 재킷과 수평 포켓이 더해진 트라우저는 스트리트적 감각을 슬며시 끌어왔다. 정장 같다가도, 어느 순간 스트리트처럼 보이고, 또 그 반대가 된다. 뎀나의 특기가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트랙수트와 드레스는 하나의 트랙드레스로 재구성했고, 레깅스와 트라우저를 결합했다. 밤부 백과 극도로 미니멀한 맨해튼 스니커즈 역시 이번 시즌 그가 제안하는 구찌의 또 다른 얼굴. 맨발로 등장한 파티 보이, 허벅지까지 깊게 갈라진 슬릿 가운과 미니드레스까지.

음악 역시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뎀나의 파트너이자 구찌의 뮤직 디렉터인 로익 고메즈Loïc Gomez가 설계한 사운드는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장르를 오가며 쇼의 결을 계속 바꿨다. 초반의 긴장감 있는 리듬은 신체를 조각처럼 부각시켰고, 중반부로 갈수록 베이스는 더 낮아졌다. 후반부에는 파티 직전의 공기처럼, 누군가 먼저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긴장감마저. 컬렉션 내 실루엣이 전환될 때마다 사운드 역시 함께 방향을 틀었다. 옷이 장면을 나누는 게 아니라, 음악이 먼저 분위기를 밀어 올리고 그 위로 룩이 얹히는 느낌.

피날레에서 케이트 모스가 등장했을 때,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가 입은 깊게 파인 블랙 드레스 아래 10캐럿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화이트 골드 GG 모티브가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좌중을 압도하는 캣워크. 톰 포드 시절의 관능적인 구찌가 스치는 순간.

쇼가 끝난 뒤 다시 조각상들을 바라봤다. 완벽해 보이지만 복제된 것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단정하는 일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모순을 드러낸 채로 무대 위에 올렸다는 사실.

헤리티지와 패션은 대립하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는 연인처럼 공존할 뿐. 이것이 뎀나가 말하는 첫 계절, 그리고 새로운 구찌의 출발점이다.

#GucciPrimavera#구찌프리마베라

text S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