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zed Earthround

장만옥이 몸에 딱 붙는 블랙 라텍스 보디슈트를 입고 폭우가 빗발치는 파리의 거리를 살금살금 돌아다닌다. 그 모습은 어쩐지 기괴한 동시에 아름답다. 홍콩에서 활동하는 배우 매기(장만옥)는 프랑스에서 제작될 한 영화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에 도착한다. 루이 푀이야드의 1915년 작품 <뱀파이어>의 리메이크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는 감독 르네 비달(장피에르 레오)이 연출을 맡기로 되어 있다. 그는 프랑스 무성영화 전성기를 풍미한 전설적 배우 무시도라가 연기한 ‘이마 베프’ 역에 매기를 캐스팅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프로젝트 제안을 수락했다. 늘 그렇듯이 영화를 만든다는 건 거기에 참여한 모두를 혼돈에 빠뜨리는 일이다. 휘말리는 일이다. 촬영 현장에서 감독과 스태프는 서로를 향해 소리 지르거나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고 매기를포함한 배우들은 이 우스꽝스러운 난리 통에 웃음기 쫙 빼고 그럴듯한 연기를 해야 한다. 그날 촬영본 시사를 마친 뒤 매기는 비로소 혼자 남게 된다. 영화는바로 그다음, 촬영이 끝났음에도 매기에게 지속되는 혼란의 시간을 보여준다. 그것은 무시도라의 ‘이마 베프’를 다시 연기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이미지를 위한이미지로 살아남기 위해 그가 시도하는 모험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영화 만들기 과정을 담아낸 영화 <이마 베프>의 주인공으로 택한 존재는 홍콩 스타 장만옥이다. 당시 장만옥은 영화계를 떠나 은둔 생활 중이었지만 우리의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직접 홍콩으로 날아가 의외로 수월하게 장만옥을 수소문해 캐스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만옥이 파리에 온다면무슨 일을 할까? 배우니까 영화를 찍겠지. 어떤 부류의 영화?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장피에르 레오가 감독하는 영화. 어느덧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손에는 자신이 코미디로 규정한 <이마 베프>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마 베프>는 코미디 영화다.

장만옥은 영화 속에서 실제 자신의 이름인 매기로 등장해 아이콘으로서의 정체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왜 그를 선택했는지에 관해서 영화는, 감독은 <동방삼협>의 일부 장면을 인용해 설명한다. 댄서처럼 공중을 떠다니는 홍콩 영화의 영웅만이 신격화된 배우 ‘무시도라’를 대신할 수 있다고 영화 속 감독은 주장한다. 따라서 그런 그녀에게 장애가 되는 것은 원작의 난해함도, 스태프의 불신도, 성질 더러운 감독의 존재도 아니다. 예술가로서 미숙한 완전함만이 그의 적수가 될 뿐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절충적 영화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이런 그의 기질은 이미 유명했다. 라이너베르너 파스빈더와 장 뤼크 고다르, 루키노 비스콘티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는 브라이언 드 팔마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홍콩 영화의 마니아로도 알려졌다. 또한장르 영화와 B급 영화, 실험 영화 수집가로도 유명했다. 어쩌면 당시에 그가 공포영화의 거장 존 카펜터를 위해 사용한 문장은, 그를 가리키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될 수 있지 않을까. “대중 영화 안에서의 실험적 형식과 역동적 미학으로, 시네필의 중심 위치를 되찾고자 하는” 영화감독으로서,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우리에게 남았다.

비평에서 창작으로 옮아간 과정에 대한 그의 회고는 흥미롭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단편을 찍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장편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 뒤에 깔린 기술과 이론을 신경쓰지 않게 됐다. 테크닉, 형식, 추상적 개념을 망각하자 나는 진짜 필름메이커가 된 것 같다. 내가 신경 쓴 문제는 내가 느낀 감정을 재창조할 수 있을지, 그 세계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을지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영화 이론 전반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전과 다른 언어를 통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뜻에 가깝다. 또한 아사야스가 예술로서 영화가 세계를 어떻게 재현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을 개인적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록 밴드 멤버들의 살인을 그린 장편 데뷔작 <혼란>부터 10대 커플의 일탈을 묘사한 <차가운 물>까지 그의 초기작은 발버둥 치는 청춘의 몸짓에 집중했다. 본인이 익히 아는 좁은 세계에서 그의 영화는 출발한 것이다. 그가 성장하고 학교를 다닌 1970년대 최고로 쿨한 것은 순서대로 정치, 음악, 시, 영화였다. 10대 후반 무렵의 화두는 펑크록이었고, 그는 그음악의 에너지 위를 미끄러지듯 서핑했다. 어려서부터 일찍이 필름메이커가 되고 싶었지만 그를 살아가게 하는 연료, 욕망, 영감의 원천은 바로 음악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현대사회에 대한 근본적 비판에 도달하려 했다. “사회는 개인성에 적대적이고 개인이 공동이 될 것을 기대한다. 지금 젊은이들에겐 공산주의자가 될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보존하면서 사회 속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투쟁이다.” 

한편, 단 9일 만에 쓰인 시나리오, 약 100만 달러 예산으로 4주간 촬영한 <이마 베프>는 그를 위해 예상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던져진 인물을 중심에 놓았다는 점에서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초기영화들과 연결된다.

홍콩 스타 장만옥과 한물간 누벨바그 감독, 지친 스태프의 자괴감에 더해 인터뷰하겠다며 들이닥친 기자는 본분을 망각하고 ‘제 배꼽만 응시하는 프랑스 지식인 영화’를 욕하고 할리우드 액션 영화 예찬에 거품을 문다. 프로덕션은 아수라장으로 치닫고 몇 가닥의 내러티브는 맺어진다기보다 각각의 길로 뚝뚝 끊어지듯 해산한다. 개봉 당시 <이마 베프>는 영화의 현실에 대한 아사야스 감독의 복잡한 감정이 드러난 일종의 에세이로 관심을 끌었다. 여기서 아사야스는 몸짓의 영화만이 보고 만들 가치가 있다는 합의에 저항하면서도, 자신이 속한 작가 영화의 세계를 씁쓸히 냉정히 서글프게 비웃는다. <이마 베프>의 절정은 도중 하차한 감독의 편집본을 영사하는 마지막에 있다. 지리멸렬한 아귀다툼 속에 엉터리로 찍고 붙여낸 필름 속에서 한순간 이해 불가능한 아름다움이 불쑥 튀어 오른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시네마.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마치 “이 기적을 위해 우리가 영화를 찍고 있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씩 웃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영화는 기적이다.  

 <이마 베프>는 홀로 끝없이 움직이는 현대의 개인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고 모종의 관계를 형성하는 미묘한 양상을 스케치하는 아사야스의 재능을 과시한다. 문학이 가장 잘하는 이 작업을 영화로 완성한 집중력에 대해 영화평론가 마놀라 다지스는 “단 하나의 틀린 음정도, 낭비된 이미지도, 잉여의 카메라워크도 없다”라고 감탄했다. 이 미덕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다음 영화 <8월 초 9월 말>은 한 작가의 죽음이 그의 주변에 끼친 여파에 대한 일지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세 친구를 에이즈로 잃고 지인 사이에 오간 대화에서 이 영화를 착안했다. 죽은 사람이 주인공이었다면 반드시 아름다운 멜로드라마가 됐을<8월 초 9월 말>은 대신 그들에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작가의 죽음을 지켜보며 실연하고 집과 직장을 바꾸는 파리 청춘의 일상을 좇아 집단적 자서전의 스타일을 획득한다. <8월 초 9월 말>을 지배하는 정서는 에릭 로메르의 아이러니가 아닌 감정이입인데, 이는 조용한 페이드 아웃과 자막으로 구성된 분절 형식을 통해 작동한다. 하루, 한 달, 반년 등 불규칙한 간격으로 배치된 여백은, 몰입을 억제하기는커녕 관객이 극 중 인물이 그간 통과한 심리적 흐름을 상상하면서 반응하게 만든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이자 그의 이름을 세계지도 위에 단단히 올려 놓은 <이마 베프>가 27년 만에 디지털 리마스터링되어 극장에서 개봉했다. 어떤 의미에서 신화와도 같았던 프랑스 독립영화계의 컬트가 마침내 국내 팬들과 정식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이마 베프>를 자세히 살피기 위해서는 무성영화 원작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테지만 최근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직접 드라마로 리메이크한 HBO 시리즈 <이마 베프>와 비교해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2022년 버전의 <이마 베프>는 1996년 작의 결말을 완전히 납득하지 못했거나, 특유의 아방가르드에 물음을 품은 관객에게 꽤 도움이 된다. 몇몇 극적 전환의 모호한 지점에 관해 영화와 달리드라마 버전에서 비교적 친절히 설명한다. 1996년에 이마 베프가 왜 목걸이를 떨어트렸는지, 마지막 결말에서 영화감독이 어떤 의도로 재편집에 몰두했는지 논쟁이 필요했던 몇몇 상황이 말끔히 정리된다. “마법사는 보이지 않는 힘을 믿는다”, “배우들은 감독의 영혼이고, 따라서 영화는 의식이다”, 만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으면” 좋은 영화는 탄생할 수 없다고 노골적이지만 선명한 대사를 이용해 시네마를 칭송한다.

이 과정에서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계획된 쇼츠가 지니는 의미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 구현된 이미지가 똑같은 구조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맥락에 따라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음을 그는 믿고 있는 듯 보인다. 그 믿음이야말로 영원한 영화광이자 영화 예술가인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원동력일 것이다. 두 시간의 인내 끝에 터져 나오는 한 번의 심호흡을 가장 자연스럽게 만드는 한없이 가벼운 터치. 모든 예술의 목적은 결국 그러한 수월함과 가벼움을 성취하는 자의 승리라고, 어느 취한 밤 누군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 지르던데.

 

Text Choi Jiwoong
Art Koo Hyemi 

더 많은 화보와 기사는 <데이즈드> 3월호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Check out more of our editorials and articles in DAZED KOREA March print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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