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아우성에 신물이 날 때면 나는 이따금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로 내면의 외침을 변주하곤 했다. 취리히, 브뤼셀, 암스테르담, 파리, 리옹, 코펜하겐, 마드리드, 시카고, 밴쿠버, 서울, 도쿄, 하노이, 쿠알라룸푸르···. 무수한 도시를 걸으며 사로잡혔던 새로움도, 타성도, 불완전함도, 짜릿함도 사실 명쾌한 답을 주진 못했다. 내가 나를 살듯, 때론 진중히 때론 무작정 이 도시를 발견하는 것만이 방도인지 몰랐다. 1970년대부터 오늘까지 서울의 여섯 건물을 골랐다.

삼일빌딩, 1971
“서울에 31층 빌딩이 있대. 너나 나나 헤어져도 그걸 쳐다보고 살자.”
종로구 관철동, 청계천 변에 강직한 미간을 드리우는 건물이 있다.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고 1971년 완공한 한국 최초의 마천루 ‘삼일빌딩’이다. 김수근과 더불어 우리나라 건축을 이끈 1세대 건축가 김중업은 현대건축 거장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이기도 하다. 미니멀리즘의 대가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의 뉴욕 시그램Seagram 빌딩에서 영향을 받아 설계한 삼일빌딩은 건물의 하중을 벽을 제외한 기둥과 들보, 바닥과 지붕으로만 지탱하고, 마치 커튼을 친 듯 유리를 둘러 외벽을 마감하는 ‘커튼월curtain wall’ 양식을 처음 채택해 당시 서울 도심 풍경 속 산뜻한 방점이 됐다. 반세기가 흘러 2020년, SK D&D와 모 투자사가 삼일빌딩을 매입해 김중업의 건축 유산적 가치는 그대로 둔 채 내외부를 재구성했으며, 지금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마지막 해였던 1971년은 여러모로 뜻깊은 해다.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삼일빌딩 준공식에 버금갈 스펙터클은 없었다. 1971년 개봉한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에서 윤여정 배우가 연기한 명자가 서울로 상경해 만난 친구가 말한다. “서울에 31층 빌딩이 있대. 너나 나나 헤어져도 그걸 쳐다보고 살자.” 이에 명자는 “31층? 떨어져 죽기 편리하겠다. 하하하.” 1985년 꼭 그 두 배 키의 63빌딩이 들어섰고, 2023년 서울은 명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희망과 좌절을 안고 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자리에서 꾸던 철골과 유리의 꿈을 가늠해 본다.

아르코예술극장, 1981
‘벽돌로 엮은 시집’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엔 1981년에 완성된 아르코예술극장이 있다.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김수근의 비일상적 붉은벽돌 구상이 돋보인다. 벽돌이 돌출되거나 꺼진 표면에 하루에도 수많은 각도와 밝기의 빛이 드나들며 셀 수 없는 톤과 무드를 자아낸다. 입구에 드리운 캐노피는 앞에 펼쳐진 아담한 공간과 어우러져 언제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게 한다. 지난해 개관 40주년을 맞은 이 아이코닉한 벽돌 건물의 터는 본래 관악캠퍼스로 통합되기 전 서울대학교 문리대 부지였다. 근방에 아파트 단지를 세우려던 주택공사로부터 당시 지식인들과 김수근이 일대 1600여 평을 사들였고, 김수근은 미술관과 공연장 건립 등을 제안하며 자신이 매입한 땅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기증하고 직접 설계를 맡는다. 아르코미술관, 아르코예술극장, 샘터 사옥, 국제협력단 건물, 서울대학교 병원 연구동 등 김수근의 작품이 붉고 단단한 꽃처럼 군집한 이곳 혜화동과 대학로 일대는, 그러니까 김수근이 ‘벽돌로 엮은 시집’이 됐다.

서빙고동 신동아아파트, 1984
이런 하늘, 그런 욕망
1984년 초여름 입주를 시작한 1300여 세대의 대단지 아파트. 용산구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아파트 단지다. 서빙고동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은 1980년대 초, 여의도에 63빌딩을 짓던 신동아그룹이 반포대교 북단 공영레미콘 공장 3만3000여 평 부지에 준공했다. 대한민국 주거의 표준이자 자산의 척도가 된 ‘아파트’에 건축·문화예술 맥락의 시선을 던지는 이는 드물다. 그 이름을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이해관계자들의 꿈과 염원인 ‘재건축’ 현황과 수십억이 오르내린 가치 변동의 경위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따름이다. 이제나저제나 흔적도 없이 허물어버릴 날만을 기다리는 시한부 철근 콘크리트 덩이 앞에서 한갓진 낭만이나 역사를 들먹이기 멋쩍으나, 분명한 것은 이 건축물이 현대 서울과 그 안에서 지지고 볶던 사람들의 욕망과 꿈을 얼마나 명징하게 투영하고 있는가였다. 새벽녘에 카메라에 담으려 찾은 아파트 곳곳에는 희고 자욱한 증기를 흩날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고가 세단이 즐비하다. 단지에 드나드는 운전기사만 수백 명이라는 모 일간지 기사를 증거하며 나는 몇 동인지 모를 수많은 콘크리트 덩어리 가운데 하나에 슬며시 들어갔다. 낡은 외관과 어울리지 않게 번쩍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오른다. 적어도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가 올려다보는 하늘은 같았다.

중곡동성당, 1996
α, 卍, Ω
다세대주택과 다가구주택이 밀집한 광진구 중곡동 제일골목시장 바로 인근, 우리네 가장 친숙한 풍경을 가로질러 다소 엉뚱한 맥락 한가운데 콘크리트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길 건너 점집인지, 팔랑거리는 알루미늄 문짝에 붙은 ‘만卍’ 자와 알파α, 오메가Ω 기호가 카메라 플래시 너머로 오버랩되는 순간이 못내 혼란스럽다. 하늘에도 산에도 땅에도 바다에도 나무에도 돌에도, 집마다 방마다 깃든 신들을 긍정하는 우리 민족의 유난스러운 종교만큼 우리는 그동안 신실하게도 행복해졌던가. “노출 콘크리트는 가장 종교적인 재료”라 이르던 건축가 승효상이 1996년 설계를 시작해 2001년에야 마무리한 성당. 5년은 건축가의 사고가 충분히 변모할 수 있는 기간이라 고백한 그의 중곡동 성당 프로젝트에 대한 소회가 이로재 웹사이트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일독을 추천.

을지대학교 강남을지병원, 2009
남루한 건축의 시대
삶에 영광만이 넘실댈 순 없는 노릇이다. 도시의 풍경도 그렇다. 도시의 얼굴에 화색을 입히며 마천루 능선을 치장하거나 세세토록 영감이 되는 건축물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도 분명히 있다. 지난 2009년 준공, 강남구 논현동의 한 사거리에 우뚝 솟은 이것은 발사 직전의 로켓이 아니라 엄연한 대형 병원이다. 2013년 동아일보와 월간 는 건축 관련 4개 단체와 건축 칼럼니스트, 건축 포토그래퍼 등 관련 인물 100명을 통해 우리나라 해방 이후 최악의 건축물 20개를 선정했다. 당시 을지대학교 강남을지병원은 모두 다섯 표를 받아 열여섯 번째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벌써 10여 년이 흘렀고, 짙은 주관이 가미된 결과라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리스트에 든, 이른바 한국 현대건축 ‘태작’의 공통점을 들여다본다면 ‘주변과의 부조화’, ‘맥락 없음’, ‘높은 예산과 낮은 실용성’ 등이 꼽힌다. 옷과 차 등 라이프스타일 전반에서 자못 엄격한 미적 잣대를 들이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못생긴 건축’에 관대한 이유를 두고 박인석 명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여전히 우리는 건축이 우리에게 무얼 해줄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저서 <건축이 바꾼다>에서 말한다. 답습뿐인 제도, 어떻게 다르게 만들지 설계에 대한 고민은 부재한 채 ‘건축의 시대’에 여전히 ‘건설’만을 고집한다는 것. 한국 현대건축의 ‘남루함’에 대한 박 교수의 고민 이후,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 건축은 고루한 답습과 혁혁한 학습을 동시 진행 중이다.

송은문화재단, 2021
거룩하게, 섹시하게
설계부터 준공까지 장장 4년 반을 달려 2021년 세상에 소개된 송은문화재단 신사옥 ‘ST송은 빌딩’은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헤르조그 앤 드 뫼롱Herzog & de Meuron(HdM)의 첫 번째 한국 프로젝트다. 경사를 따라 이어진 도산대로의 가장 고지대에 올라선 이 빌딩은 그동안 런던 테이트모던이나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등의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HdM의 프로젝트 가운데에는 비교적 소규모에 속하지만, 주변 여느 오피스나 상업 빌딩과 다르게 응축된 에너지를 품고 있다고 이들은 설명한다. 건축가의 고민은 고로쇠나무, 그렇게 탄생한 건축물은 고로쇠 수액 같다. 고로쇠나무가 겨우내 뿌리에 한껏 모아둔 수분과 양분을 채취한 고로쇠 물. “건축물은 건축물이다. 그것은 책처럼 읽힐 수 없다. (···) 건물을 찾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에너지. 그게 우리 건축의 강점이다.” 지극히 미니멀한 조형. 대로에서 조망하면 어쩐지 거룩해 보이는 거대한 단일의 덩어리지만, 이면도로에서 바라보면 매 층에 테라스가 시야와 바람길을 터주는, 백리스 드레스처럼 차라리 섹시한 건축. ‘숨어 있는 소나무(송은)’라는 시적인 이름을 구현한 건물 표면 질감. 목판 거푸집에 양생한 콘크리트 벽으로 마치 거대한 한 폭의 회화가 된 파사드. 지하부터 2층까지 이어지는 압도적 스케일의 나선형 계단은 송은문화재단만의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파운드 스페이스’가 된다. 드 뫼롱은 미술관의 기능을 작품과 관객 너머에서 사유한다. 건축도 마치 예술처럼 온 감각으로 누리는 것, 기능function, 인지perception, 표현expression이 충족된 건축이야말로 편하고 아름답다고 믿는다. 서울의 표정이 하나 더 생겼다.
Text & Photography Lee Hyunjun
Art Kang Ji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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