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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독일 영화 감독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말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이 힐난의 대상은 다름 아닌 서정시.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재난은 인류 모두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고, 전쟁과 죽음이 난무한 파국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그 어떤 증언과 고백도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다. 그렇게 도래한 서정 불능의 상태. 독일 출신의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첫 장편 데뷔작 <내가 속한 나라>(2000)를 통해 이 서정적 자아를 스스로 억압하며 생존하는 어느 한 가족과 성장기 소녀 잔의 이야기를 그린다. ‘내가 속한 나라’라는 영화의 제목이 무색하게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떠도는 이들의 사정은 실패한 좌파 테러리스트였던 부모와 그래서 어쩌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자식이라는 것. 무엇으로부터 쫓기는지, 왜 쫓기는지 영화는 정확히 말하지 않고 다만 15년 동안 쫓겨왔고 쫓기고 있음을 페촐트는 102분 가량의 시간을 몽땅 소진해 보여줄 뿐이다. 특히 십대 소녀 잔이 처한 세계는 더욱 척박하고 황량하다. 국가, 가족, 또래 집단 그 어떤 공동체에서도 연대의 감정을 느껴본 적 없이 자랐을 그는 유행하는 옷을 입을 수 없음에 격분하는 사춘기 소녀이자, 부모님의 낯 뜨거운 신음 소리를 태연하게 듣고 넘기는 조숙한 아이. 그런 잔이 처음으로 느낀 사치스런 사랑의 감정은 돌이킬 수 없는 위협이 되어 결국 그의 가족을 비극으로 몬다. 그러니까 잔에게 서정은 기만이다.

독일 베를린파Berliner Schule로 구분되는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내가 속한 나라> 이후로도 꾸준히 독일의 역사와 정치, 그리고 일상을 주제의식 삼아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인물이다. 베를린파 영화의 주제적 특징이라면 통일 이후 혼돈과 불안정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을 꽤나 정적인 프레임 안에 담는다는 것. 허나 찢긴 북이 고요하듯 영화 속의 적요한 풍경은 어떤 무분별한 파괴 행위가 휩쓸고 난 뒤의 상실과 부재의 무대다.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이 무대 위에서 자칫 무화될 수 있는 평범한 이들의 고통을 특수한 방식으로 낱낱이 비춘다. 그의 영화 <바바라>(2013)에 등장한 그림은 그의 시선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렘브란트의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를 앞에 두고 의사 바바라와 그의 동료 안드레는 나눈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저기 손은 도감의 해부도를 그대로 옮긴 것처럼 그렸어요. 렘브란트는 사실 우리는 볼 수 없고 저기 있는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것을 그림에 그려 넣었죠. 손의 해부도 말입니다. 이 실수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의사들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희생자 아리스 킨트를 보게 되죠.“ 아리스 킨트라는 인물의 사체를 해부 하는 장면이 담긴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왼손이 오른손처럼 그려져 있던 것이었다. 훼손된 신체와 자칫 한 번 더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류의 고통. 예고한듯 그의 영화 <피닉스>(2021)에는 얼굴이 훼손된 여성의 육체가 엄연한 실체로서 자리한다. 그 주인공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넬리. 그는 심하게 훼손된 얼굴을 성형 수술을 통해 일부 복구한 후, 과거의 행복을 되찾기 위해 사랑하는 남편 조니를 찾아 나서지만 끝내 절망한다. 바뀐 얼굴로 나타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조니가 아내의 유산을 갖기 위해 넬리 자신에게 ‘넬리’ 연기를 해줄 것을 요구한 것. 넬리가 느낀 사랑에의 무상함과 산산조각난 현실에서는 서정의 낌새를 찾아볼 순 없지만 영화의 마지막, 넬리는 아름답고도 한 서린 목소리로 ‘Speak Low’를 부르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숨겨진 아픔이 들추어지고, 잊힌 진실이 폭로되는 순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유대인 대량 학살이 자행된 수용소 아우슈비츠를 다시 꺼내는 일은 과연 무엇을 겨냥한 것일까. 어느 시인이 말하기를, 절망을 말하는 자는 끝내 낙관을 저버리지 못하는 자라고 했던가.

페촐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아도르노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모든 것을 무릅쓴다. <열망>, <바바라>를 거치며 그의 영화에는 다분히 멜로드라마의 정념을 띈 인물들이 등장하고, 서정의 방식을 통해 으레 역사 영화와는 달리 인물과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과 단순한 이분법은 배제한다. 다만 억압과 폭력을 암시하는 잔존하는 이미지가 거기 남아 있을 뿐이다. 앞서 언급한 <피닉스> 외에도 <운디네>, <트랜짓>의 페촐트가 직접 명명한 역사 3부작 속 불안한, 혹은 불완전한 연인들의 포옹들은 어딘가 희부옇게 피어나는 낙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 반복되는 파국 속, 과거의 몰락에 머물지 않고 완결된 역사를 다시 잇는 페촐트의 영화는 파괴된 서정의 역사를 전복하는 것으로 다음을 도모한다. 절망을 절망하기 위해, 망각을 망각하기 위해.

 

Text Kwon Sohee
Art Koo Hy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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