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X 커스텀 키보드
TX65 PC 하우징에 TX레모네이드 스위치 키캡과 해머웍스 승화 키캡으로 구성 — 이이호 (TX키보드 대표)
이번 기사를 기획하면서 취재차 서산에 위치한 TX키보드를 방문했다. 오랫동안 학원 강사를 하다 커스텀 키보드 사업에 도전한 이이호 대표는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밥부터 먹자”며 근처 단골집에서 보쌈 정식을 사주었다. 키보드라는 주제를 포괄하는, 건강을 지키는 마음가짐과 어떻게 하면 잘 사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우리는 돌고 돌아 몇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것’, ‘타인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 ‘쉽게 결과를 바라지 않고 꾸준히 할 것’. 이 메시지는 그의 키보드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키보드 몸체인 하우징부터 보강판, 스위치, 타건감을 균일하게 잡아주는 스테빌라이저까지 하나의 부품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과정을 들어보면 단 한 번도 수월하게 넘어간 적이 없었다.
“커스텀 키보드라는 장르가 생기기 시작했을 무렵 OTD(On The Desk), 키보드 마니아 같은 커뮤니티가 유행했어요. 커뮤니티에서 하우징 같은 부품을 공동구매 형식으로 주문받아 만들기 시작했는데, 저도 궁금해서 사봤죠.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 신문지에 대충 둘둘 말아 보내 막 깨져 있고 난리도 아닌 거예요. ‘내가 만들어도 이보단 낫겠다’ 싶었는데 소량으로 생산하다 보니 한국에 있는 공장은 다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타협을 잘 못 하는 사람이거든요. 제가 원하는 수준을 구현하려면 중국 공장에 의뢰해야 하는데 그때 아내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아내가 중국 사람이라 현지에 아는 사람을 통해 원하는 부품을 만들어줄 공장을 찾고, 미팅하고, 직원 뽑고. TX는 아내 이름에서 따온 거예요. 아내 이름이 우리말로 ‘동신’인데, 영어로 표기하면 ‘Tong Xin’이거든요. 아내 도움이 계속 필요한데 어떻게 하면 아내가 도와줄지 고민하다 아내 이름을 딴 TX키보드로 사명을 지었어요. 소문자로 하면 +랑 × 같아 보이기도 하고, 키보드 스위치가 + 모양이기도 하니 잘됐다, 싶었죠. 스테빌라이저는 제가 최초로 개발한 이중 사출 방식이에요. 철심이 닿는 부분이 TPU 소재로 되어 있어 윤활 작업 없이도 경쾌하고 이질감 없는 타건이 가능하죠. 이 스테빌라이저가 대박이 나서 미국에 있는 벤더가….”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여기서 키보드 하나 구매할 수 없을까’ 작은 기대가 생겼다. 사무실에는 각종 빈티지 키보드부터 그가 만든 부품으로 완성한 다양한 조합의 키보드가 가득했으니 말이다. 군데군데 쌓인 박스에도 입이 떡하고 벌어질 키보드가 숨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키보드에 관한 온갖 질문은 친절히 알려줘도, 쉬운 방법으로 좋은 키보드를 얻으려는 태도에는 단호한 모습을 보일 것 같아서. 무엇이든 공부하고 경험한 만큼 얻는 것이니까.
인터뷰와 수다 사이를 오가던 취재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대표님이 진열장에 있는 키보드 하나를 가져와 건넸다. “아는 사람에게는 어울리는 키보드로 종종 선물해요. 키보드가 너무 많은데 일일이 파는 건 더 일이고. 이걸로 오래오래 좋아하는 일 했으면 하는 마음이니 받으세요.” 뜻밖의 기회에 운명의 키보드를 가지게 되었다. 이이호 대표가 선물한 키보드는 사무실에서 열심히 사용하고 있다. 키보드 앞에 앉아 자판 위로 손을 얹을 때면 서산의 심심한 풍경이 떠오른다.

빈티지 왕WANG 키보드 — 강승엽 ( 에디터)
타닥타닥. 인간이 언어를 쓰고, 언어를 이용해 컴퓨터를 다루는 세상. 키보드는 구조가 비교적 단순하고 태생적으로 역할이 한정되어 있어 컴퓨터 입출력 장치 중 가장 시대를 타지 않는다. 그 덕에 30~40년 전 유통된 키보드는 여전히 높은 수요를 보이고, 그 기능도 충분히 수행 가능하다.
몇 해 전, 중고 장터를 기웃거리다 왕WANG이라는 미국 컴퓨터 회사가 만든 키보드를 발견했다. 연식이 얼마나 되었는지, 어떤 구성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생김새가 마음에 들 뿐이었으니. 곧장 직거래 현장으로 향했다. 판매자는 갓 입대한 군인이었는데, 어떤 사정이 있는지 그의 어머니가 대신 키보드를 들고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미리 알려준 계좌번호로 입금을 하고 키보드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키보드의 생김새만큼이나 타건감이 매우 묵직하고 뻑뻑했다. 외관과 비슷한 느낌이라 생각하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한참을 쓰다 뒤늦게 안 사실인데, 키보드 자체에서 독특한 소리가 났다. 키보드 하판 좌측에 스피커가 달려 있어 두드릴 때마다 삐용삐용, 삥삥, 뿅뿅 같은 특이한 효과음이 난다.
왕 키보드는 별다른 기능도 특이점도 없지만, 지극히 키보드 같은 형태 하나로 집에 놀러 온 지인들에게 적잖이 반가움을 샀다. 그들은 마치 오래된 컴퓨터실에 온 듯 그대로 자리에 앉아 신나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나조차 지나간 어느 시절을 회상하듯 찾은 키보드이니 그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흡족했다. 가끔 다른 키보드를 장만할까 고민 하다가도 같이 늙어가는 오래된 친구 같은 기분이 들어 ‘이만하면 충분하지’ 생각한다.

씽크패드 울트라나브 구형 — 박찬용 (에디터, 칼럼니스트)
일은 일이니까 내게는 효율이 중요하다. 그래서 씽크패드를 썼다. 씽크패드 중앙의 ‘트랙포인트’ 때문에 마우스 커서를 움직이기 위한 팔이나 손가락 움직임을 최소화할 수 있다. 아울러 나는 원고 작성을 포함한 업무 전반에 엑셀을 사용한다. 시각적으로도 마이크로소프트와 윈도우 레이아웃이 가장 마음 편하다. 요약하면 컴퓨터 문서 작성을 할 때의 나는 레노버 씽크패드에 최적화되었다. 데스크톱에도 PC용 씽크패드 울트라나브를 쓴다. 이건 구형으로, 유선 버전이다.
소음 정도와 가격도 이 키보드를 고른 이유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는 거의 모든 기간에 각종 회사에서 지냈다. 회사는 단체생활이니 상대적으로 소리가 큰 기계식 키보드로 남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기계식 키보드는 가격도 비싼 편이었다. 적어도 내 일은 프로게이머처럼 촌각을 다투는 키보드 플레이를 하는 일이 아니다. 키보드는 업무용 소모품이다. 굳이 비싸지 않아도 된다. 키보드는 테니스 라켓처럼 더 비싸다고 더 정교한 플레이가 가능해지는 물건이 아니다. 오히려 팬터그래프 키보드는 키감이 가벼워 손가락 관절에도 무리가 덜할 것 같았다.
나는 무던하다. 나는 에디터라는 내 기능에 충실하고 싶고, 그게 다다. 그러니까 키보드에 감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PC용 울트라나브를 쓴 또 하나의 큰 이유 역시 책상 면적 효율이다. 사무실 책상에 마우스를 안 놔도 되니까. 나는 이 일에도 감성적으로 접근한 적이 없다. 나를 글 쓰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직업 에디터일 뿐이다.
그런 생각으로 고른 이 키보드를 오래 쓰고 있다. 가운데 트랙패드는 원래 붉은색 고무 재질이다. 몇 년 동안 쓰다 보니 그 고무가 다 닳아 트랙패드 기능을 잘 하지 못할 정도가 됐다. 혹시나 싶어 찾아보니 어느 개인이 3D프린터로 만든 사제 트랙패드를 판매하고 있었다. 이거다 싶어 사서 끼우자 딱 맞았다. 먼지만 닦아주면 여전히 멀쩡하다. 지금도 꾸준히 이 키보드를 쓴다. 나도 이 키보드처럼 무던하고 쓸모 있는 걸 만들고 싶다.

커스텀 키보드
YMDK의 나무 하우징에 황동 보강판과 홀리판다 스위치로 구성 — 정용준 (소설가)
마스크를 써야 했던 시절, 다들 그랬듯 나 역시 침울했다. 방에 틀어박혀 심란한 뉴스를 봤고 거짓과 허영으로 가득한 영상과 이미지만을 소비했다. ‘고립’. 생각하기에 따라 읽고 쓰기에 딱 좋은 환경인데, 활력이 떨어지니 문학적 욕망이 생기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지.
기력 없이 누워만 지내던 어느 날, 키보드 ASMR을 들었다. 그동안 나는 키보드를 문자 입력 도구 이상으로 인식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영상 속 키보드는 타악기였고, 아름다운 오브제였다. 문득 생각했다. 저런 키보드 하나쯤 갖고 싶다.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던 욕망은 기계식 키보드라고 부르는 저 스위치를 직접 눌러보고 싶다는 것. 걸림이 무엇인지, 키감이 무겁다는 감각이 도대체 어떤 느낌인지, 타이핑할 때 자갈이 굴러가는 것 같은 저 유혹적인 소리가 진짜인지 도무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에 마침내 구매했다. 처음엔 가성비 제품으로, 다음엔 중고로, 결국엔 여러 부품을 조합해 커스텀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스위치를 분해하고 스프링에 윤활유를 발랐다. 가위로 오린 흡음재를 기판 밑에 넣고 미세하게 달라진 소리에 희열을 느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하는 생각에 실소가 흘러 나왔지만, 좋았다. 단순한 몰입이 구겨진 마음을 펴주는 것 같았다.
한동안 글을 못 쓰고 있었다. 쓰고 싶은데 쓸 힘이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키보드를 누르고 싶어서, 그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서, 아무 글이나 써대기 시작했다. 단어에서 문장으로, 낙서에서 일기로, 편지에서 에세이로, 짧은 이야기에서 소설로, 글은 꼴을 갖춰가며 단단해졌다.
글이 써지지 않아 키보드를 만졌는데, 키보드 덕분에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되다니! 얼마 전에 출간한 산문집 도 그렇게 쓴 글이 모여 있다. 도구와 재료에 대한 사랑이 내용과 표현에도 깃들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음악이 없어도 음악적인, 아주 가끔은 시적이기까지 한 쓰기의 새로운 경험은 키보드를 쓰기의 도구가 아닌 고유한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페커 앨리스80
게이트론의 백축 스위치와 당근마켓에서 구매한 키캡으로 커스텀한 버전 — 정세랑 (소설가)
앨리스 배열의 키보드, 그것도 중앙이 솟아 있는 모델만 사용한 지 좀 되었다. 처음 한두 권의 소설을 쓸 때는 일반 키보드로도 문제가 없었는데 열 권을 넘어서자 양 손목에 심각한 터널증후군이 생기고 말았다. 낮에도 아팠지만, 특히 밤에 잠들었다가 깰 정도로 통증에 시달렸다. 고심 끝에 손의 자연스러운 위치와 각도를 고려해 설계된 앨리스 배열 키보드로 바꾸자 두 달여 만에 증상이 사라졌다. 더 일찍 바꿀 걸, 후회했다. 손목 통증으로 고생하는 분들에게 꼭 권한다. 분량이 짧은 장르라면 몰라도 긴 장르의 글을 쓰는 이라면 더더욱. 아무도 알려주지 않지만 손목은 ‘소모품’이다.
같은 이유로 키압이 낮은 스위치를 선호해 게이트론 백축을 써보고 싶었다. 그런데 원하는 조합을 찾기 어려워 페커 앨리스 기판을 직구한 다음 스위치와 키캡은 따로 구해 끼웠다. 정확하게 눌리고 소음도 심하지 않아 꽤 만족하지만, 언젠가 보다 곡면 형태의 키보드를 써보고 싶다. 누군가는 뭘 저렇게까지 과한 걸 쓰나 싶을지 몰라도 내겐 중요하다. 키네시스 어드밴티지2나 어드밴티지360같이 알려진 모델에도 끌리고, 매년 등장하는 새로운 제품도 흥미롭다.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에 꼭 맞는 운명적 키보드가 등장할 것만 같다. 머릿속 이야기를 꺼내줄 다른 장치는 없으니 소설가에게 키보드는 핵심 도구일 수밖에 없다. 생김새가 괴상해도 상관없다. 창작의 혁신이 연달아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한동안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더니 손목 상태가 꽤 나아져 일반 키보드로 돌아가도 괜찮을 성싶지만 예방 차원에서 앞으로도 앨리스 배열의 키보드만 쓸 것 같다. 앨리스 배열 키보드를 쓰는 사람이 많아져 키보드 제작자들이 한층 과감한 텐팅 키보드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한 번 써보면 도무지 돌아갈 수 없다.

소리자바 자바포스 로즈 핑크 리미티드 에디션 — 손자현 (속기사, 속기사무소 대표)
법정 드라마나 국회 중계를 보면 언제나 한쪽에서 조용히 타자를 치고 있는 속기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속기사가 쓰는 키보드는 얼핏 보기에 일반 키보드와 비슷해 보이지만 작동 방식이 꽤 특별하다. 가장 큰 차이는 자음과 모음을 한 자씩 치지 않고, 마치 피아노 건반을 여러 개 누르듯 타건하는데, 두드린다는 표현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시대 발전에 따라 속기 키보드의 기능도 최신화되었다. 검찰청 재직 당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 중이었는데 갑자기 건물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 피의자신문은 그대로 진행되어야 했기에 속기 키보드의 블루투스 기능으로 태블릿PC와 연동해 공백 없이 조사 내용을 무사히 기록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저장한 문서를 불러오든지, 현재 쓰고 있는 문서를 저장하든지, 다른 기록을 위해 새로운 메모 파일을 여는 등 미리 탑재된 버튼 하나로 손쉽게 작동할 수 있다.
자주 쓰는 말은 자동으로 완성해 주고, 한글로 입력하면 알아서 영어나 한자로 바꿔주기도 한다. 그래서 알파벳 철자를 일일이 생각하며 입력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입력돼 속도를 유지하며 작업할 수 있다. ‘대한민국헌법제2조제1항’ 같은 긴 법률 용어가 연달아 나올 때도 미리 등록해 둔 약어 기능으로 단 두 번 키를 입력하면 완벽하게 처리된다. 옆자리에서 보고 있던 검사가 놀란 눈으로 키보드를 쳐다보던 모습이 기억난다. 종종 말보다 손이 빨라 틈틈이 숨을 고르기도 한다.
그리고 상상 이상으로 튼튼하다. 생활 방수와 특수 코팅이 되어 있어 물을 엎지르거나 실수로 떨어뜨리는 정도의 충격은 아무렇지 않다. 이런 이유로 속기사는 키보드를 한 번 고르면 오랫동안 사용한다. 요리사의 칼, 시계공의 루페처럼 속기사는 평생 키보드와 함께한다. 자칫 디자인이 질릴 수 있는 점을 고려, 요즘엔 소소한 커스터마이징도 가능해 다양한 색상의 키 스킨으로 키보드를 꾸미기도 한다.
언젠가 법정 드라마나 국회 중계를 보게 되면 속기사와 그들의 특별한 도구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순간을 어떻게 기록하고 보존하는지 관심 가져주면 좋겠다.
text KANG SEUNGYEOP(TAKU)
photography YEON GWONMO(MOGAN)
art YANG HYEIN(INGU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