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zed Earthround

’태평성대’ 같은 건 이제 없다. 영락없는 고어古語가 된 네댓 글자를 만날 때면 언제 쓰는 말이었더라 가늠도 되지 않을 만큼 케케묵은 감상마저 든다. 자고 일어나면 경악을 경악으로 덮어두어야 할 일투성이. ‘게임 체인저’는 전설의 그분이 아니라 일상의 아무개가 된 지 오래.

‘패러다임paradigm’은 마치 닻처럼 역사 내내 축적되어 온 우리 인식과 사고를 한데 묶어 정박하는 육중한 무언가였다면, 이제는 패러다임만큼 얄팍하고 미심쩍은 단어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흔적도 없이 세상의 주유소가 모조리 어디론가 증발해 버리는 날이 올까. 상념에 사로잡히자 나는 분수도 없이 분주해졌다. 순수 전기차 볼보 C40을 타고 성남과 용인을 거쳐 안동의 어느 고속국도까지 내달렸다. 두 집 건너 주유소가 즐비한데, 그중 절반이 영영 문을 닫았다.

개벽을 예고하는 크고 작은 징조가 산재한다. 볼보의 발걸음도 유의미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중 상징적이고도 실질적인 스텝은 ‘레더-프리leather-free’ 선언이다. C40 내부에는 동물에게서 얻은 천연가죽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비건 레더 등 가죽 대체 패브릭만 사용하며 ‘책임감 있는 럭셔리’를 표방한다. 가죽과 패브릭 중 웃돈을 주고 가죽 시트 옵션을 선택한 후 뿌듯함에 젖은 소비자 모멘트에는 고요한 종말이 찾아왔다. 또 내부에는 부분적으로 재생 원료를 사용해 오묘한 ‘피오르 블루’ 컬러로 감각을 살린 카펫이 극야 같은 한밤중 고속도로 위에서도 산뜻함을 배가한다.

‘직관’은 기술을 주물러야 하는 인간에게 중대한 화두다. 인터넷이 사물에 스며들고 기계가 신체를 대신해 상상 너머로 확장하는 시대에는 직관성만큼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해 주는 요소는 없다. 볼보 C40은 올라타는 곧장 출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주차 후 바로 내리면 된다. 이보다 단순할 순 없다 믿어왔던, ‘시동’을 거는 인간과 기계의 매개 행위가 허물어지자 또 다른 차원의 직관 세계가 열렸다. 내가 타면, 볼보는 간다.

좁다란 구시가지의 골목길은 모던 드라이버에겐 큰 위협이다. 더 작고 콤팩트한 차를 고집하는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는 여전히 위용 넘치는 자태의 세단과 SUV가 인기다. 서울 성수동 골목, 나는 볼보 C40을 타고 좁은 시야각을 실눈으로 가늠하며 아슬아슬하게 후진을 한다. 별안간 크고 둔탁한 소리, 진동과 함께 차가 선다. 아뿔싸. 빌린 차로 이 사단을 냈으니 눈앞이 하얘진다. 차체는 상처 없이 말끔했다. 자동 브레이크 기능은 보험부터 손해배상, 나와 누군가의 신변 변화 등 한순간에 주마등처럼 뿌려진 수심을 순식간에 거둬냈다.

볼보라는 브랜드의 정수는 여전히 ‘삶’을 향한 투명함에 있다. 세뇌당하다시피 한 ‘전기차 = 친환경’ 등식의 이면에는 우리가 속속들이 파헤치지 못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의식 있는 소비자들은 인지하고 있다. 전기에너지 자체는 탄소를 배출하지 않지만, 방대한 양의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석탄과 석유가 필요하다. 화석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고, 결과적으로 석유를 자동차의 직접 에너지원으로 쓰지 않고 전기차를 위한 전기 에너지원을 만드는 데 쓰는 행위는 엄밀히 말해 친환경적일 수 없다. 볼보는 당사 웹페이지의 ‘Lifecycle Carbon Footprint’에서 다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전기차 C40 리차지는 수명을 다할 때까지 가솔린엔진 모델인 XC40보다 탄소를 덜 배출하는 것은 맞지만, 해당 차량을 충전할 때 사용되는 전력원은 전체 탄소배출량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따라서 가능하다면 재생전기를 사용해 충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우리의 패러다임은 전복되거나 새로 정립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아직, 더욱 정교하고 풍성한 삶의 층위를 향해 ‘충전 중’인지도 모르겠다. 여태 자동차보다 인간을, 기술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온정 있는 것들을 위한 삶을 예찬하는 볼보의 세상이 그래왔듯. 

Editor Lee Hyunjun
Photography Park Sangjun
Art Kang Joohyun

더 많은 화보와 기사는 <데이즈드> 2월호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Check out more of our editorials and articles in DAZED KOREA December Print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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