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zed Earthround

전 영화에 위로를 받아요.

열아홉 살이었어요.
충무로 영상작가 전문교육원에 무작정 찾아가 시나리오를 배웠죠. 
6개월씩 1년 반 과정으로 초급·중급·고급반 순서로 구성됐어요.
학원비가 당시 제 형편으로 감당하기엔 상당히 비쌌는데, 거길 다니려고 청소부터 서빙까지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매주 화요일, 금요일 저녁에 수업이 있었죠.
수업도 좋았지만 수업 후 충무로 구석구석에 있는 선술집에서 같은 반 형, 누나 때로는 선생님과 마시던 막걸리와 소주가 더 좋았어요.
밤새 영화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시나리오가 좋은지,
우리 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한 번은 비가 막 쏟아지는 날
막걸리에 파전을 먹으며 한참 영화 이야기를 하는데요,
꿈만 같더라고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행복하더라고요.
아, 그때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요.

전 머리가 노랬어요.
처음 딱 학원에 들어섰는데, 웬 양아치가 시나리오를 배우러 온 거지? 딱 그 생각을 하고 계신 것처럼 깜짝 놀란 선생님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죠.
형, 누나들과 전 열 살 이상 차이가 났고 40, 50대도 꽤 계셨죠.
전 스스럼없이 어울리려고 노력했어요.
영화를 정말 좋아하고 꼭 좋은 시나리오를 쓰고 싶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분들이 절 귀여워해주셨어요.
기특하다, 잘해라. 네 나이엔 뭐든 할 수 있다, 이러면서요.

그렇게 반짝반짝 6개월 초급반 코스가 끝나고 마지막 과제가 주어졌어요.
통과하려면 단편 하나를 써서 제출해야 했죠.
제 인생 첫 시나리오 제목이 뭔지 아세요?
리. 모. 콘. 맨.

한 사람이 사고를 당하고 우울한 일에 빠졌는데 우연히 병원에서 얻은 리모컨을 눌렀더니 그 사람이 원하는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실로 유치 찬란하고 기상천외한 이야기였죠. 결말은 좀 슬펐어요. 결국 리모컨이 그 남자를 공격하게 되니까요.

제 과제를 보시곤 선생님이 두 가지를 말씀하셨어요.

“노란 머리, 넌 맨날 술만 마시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가르친 대로 기본 구성에 충실하게 썼네. 계속해보자. 패스!!!” 이런 기쁜 이야기와 또 하나는요,

“노란 머리, 내가 왜 합격을 줬냐면 KBS 2TV에서 하는, 왜 그 어린이 판타지 드라마 있지? 그런 거 쓰면 잘하겠단 생각이 들어서야.” 쾅쾅쾅, 머리를 때리는 ‘기쁜’ 이야기도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선생님, 제가 아직 어리지만 언젠간 꼭 어른스러운 판타지도 해보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라고요.

그다음 6개월은 중급반이었죠.
주객전도 아시죠? 다시 말하지만 그때 전 열아홉 살이었다고요.
학원비 벌려고 다닌 아르바이트가 어찌나 재밌던지요. 그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연신 지각, 결석을 밥 먹듯 하다가 채 중간을 채우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어요.

그런 제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휴대폰으로 혹은 집으로 같은 반 형, 누나, 심지어 선생님까지 전화를 하셨죠.
“너, 할 수 있어. 학원에 나와. 같이 영화 이야기하자.”
엄마가 선명히 기억하세요. 그분들의 설득을, 음성을, 바람을.

저도 보고 싶어요. 연락을 피한 건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하고요.
어렸나 봐요.

그러고 전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조금 개인적 이유로 급하게요.

그렇지만 시나리오 공부에 대한 꿈은 잃을 수 없었어요.
일본에서 3년여 공부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한 것도 충무로 
그 학원을 찾은 거였으니까요.

다시 중급반으로 등록했어요.
도쿄에서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한 덕에 자금 사정은 넉넉했어요.
그렇게 한 번 두 번 수업을 이어가고 있었는데요,
네, 전 동시에 패션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이기도 했고요.
운 좋게도 재학 중에 캐주얼 브랜드 VMD 파트 인턴으로 취직을 하기도 했어요.

아시죠? 첫 사회생활, 게다가 패션계.
얼마나 화려하고 재밌었겠어요?

청담동, 압구정동의 화려한 조명과
말발 좋고 근사한 옷차림으로 무장한 패션 피플에게 현혹돼
결국은 시나리오 공부를 포기하고 말았죠.

청담동 바닥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 피플이 될 테야!

제 꿈은 영화작가에서 패션계 히어로로 그렇게 수정됐습니다.

또 시간이 흘렀어요.
참 속절없이 계속 흐르는 게 시간이라고, 지금부터라도 좀 잡고 싶은데 말이죠.
그렇게 20여 년 남짓 전 제 혼을 바쳐 패션계에서 열심히 일했어요. 
에디터, 마케터, 스타일리스트, 방송, 책, 강의, 패션쇼, 쇼룸 비즈니스, 뷰티··· 
뭐, 안 해본 거 없이 다요.
그러다 이렇게 <데이즈드>까지요.
꽉꽉 채웠죠. 패션으로.

그런데 그럼에도 뭔가 허전했어요.
거의 매일 영화 한 편은 꼭 보고 자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영화에 대한 꿈은 버리려야 버릴 수 없었으니까요. 네, 전 이야기를 만들고 캐릭터를 창출하는 사람이고자 했으니까요. 어떤 방식으로든요.

그러다 작년 12월,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준 큰 사건이 하나 발생하게 됩니다. 네, 추운 겨울이었어요.

+10월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에디터스 레터 연재는 처음 보셨죠?

 

 이겸
李兼
Guiom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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