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전부터 침대 머리맡 작은 책장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꽂혀 있었다. 나는 한 번도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아니면 조금 일찍 잠에서 깼을 때 아무 데나 펼쳐서 몇 줄 읽고는 다시 덮는 식이었다. 그러니 <데미안>이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 끼워 맞출 수 없는 파편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밤에는 제8장 ‘끝의 시작’에서 몇 줄을 읽고 덮었다.
“나는 선선히 눈을 감았다. 내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입술에서는 계속해서 조금씩, 그러나 결코 줄어들지 않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어떤 죽음은 찢어질 것처럼 아프지만 또 어떤 죽음은 헤아릴 수 있다. 그럴 수 있다고 그럴만 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길고 긴 안식만이 당신을 감싸 안을 것이라 축복한다.
휘트니 휴스턴과 알렉산더 맥퀸이라는 이름이 있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8월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알렉산더 맥퀸은 1969년 3월 영국 런던 루이셤에서 태어났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환경과 문화를 접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동시대를 감내했을 그들이,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았을지 궁금해진다. 무대에 선 휘트니 휴스턴이 알렉산더 맥퀸의 옷을 입은 일이 있는지, 시네이드 오코너 같은 음울한 록을 즐긴 알렉산더 맥퀸이 휘트니 휴스턴의 영혼으로 가득한 노래를 듣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런 거 말이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마침 둘의 이름을 함께 부르고 싶어졌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올가을 서울의 극장에서는 휘트니 휴스턴을 기억하는 다큐멘터리 <휘트니>와 알렉산더 맥퀸을 다시 보는 다큐멘터리 <맥퀸>이 걸려 있거나 그럴 예정이다. 나는 또한 예전부터 휘트니와 맥퀸을 내 가장 귀한 친구로 여겨왔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그저 내 맘대로 ‘절친’을 맺었다. 어쩌면 그 둘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휘트니>와 <맥퀸>을 연달아 본 어떤 밤, 나는 한 사람의 삶을 목격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두 편의 다큐멘터리는 모두 ‘위대한’이라는 뻔한 수식 따위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