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여름
영화와 영원과 여름
모기가 윙윙 날기 시작하는 초여름이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된다. 특히 여름만 되면 캔맥주 하나를 톡 하고 까 들고는 주인공이 배낭 하나 단출하게 매고 여기저기 떠나버리는 로드무비를 본다. 가끔은 낭만보다는 발악에 가까운 몸짓으로 서울 어귀를 윙윙 돌다, 그런 갈증의 마음으로 종종 찾게 되는 곳이 있다면 이곳 종로의 에무시네마. 명징할 정도로 서울의 정중앙에 위치했지만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꽤나 희소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여름은 가능성의 계절 같아요. 뭔가 할 수 있고, 어디로든 나갈 수 있고, 그래서 우연이 더 열려 있는 느낌이에요. 여름밤이 또 길잖아요.” 종로의 에무시네마에서 4년 째 ‘별빛 영화제’를 꾸리고 있는 양인모 프로그래머의 말. 이곳에서는 여름과 가을에 걸쳐 저녁 8시 30분, 약 두 시간에 달하는 영화를 작은 루프탑에서 상영한다. 영화를 보다가 모기나 매미의 방해를 받을지 모르지만 그마저도 꽤나 여름을 선명하게 감각할 수 있는 일. “관객들의 생각이나 감정을 어루만질 수 있는 영화들을 주로 틉니다.” 그 이름처럼 별빛이 내리는 어느 여름, 까만 밤을 배경 삼아 영화를 본다면 그 기억만큼은 영원에 가까울지. LOCATION 에무시네마
롱아일랜드 티의 야상곡
‘The Best Of Classic Country Songs Of All Time 1660 Greatest Hits Old Country songs’ 라는 길고 긴 이름의 플레이리스트 속 컨트리 음악이 영영 끊길 틈 없이 흘러나오는 곳. 이태원 소방서 뒤 경사진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뜻하지 않게 마주할 수 있는 그랜드올아프리는 여든넷의 바텐더 삼숙이 75년도부터 지켜온 클럽이다. 빨간 조명과 덕지덕지 그 수를 셀 수 없는 지폐들이 역사를 방증하듯 기묘하고 수상한 정감이 감돈다. “내가 올해 여든넷이야. 대단하다고? 대단하니까 해먹지! 여든넷에 바텐더 하는 놈이 어디있냐!” 여든넷 삼숙은 우렁차다가도 짐짓 허무한 표정으로 해야할 일들을 하다, 수시로 찾아오는 온갖 여행객들을 지친 기색도 없이 맞이한다. 그 시간,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세월’이라는 삶의 부피가 뭔지, 감상에 젖기 일보 직전, “노 프라블럼!” 하는 걸걸한 삼숙의 목소리가 더위의 끈적함까지 남김없이 훠이 훠이 쫓아낸다. “여름엔 롱아일랜드 티”라며 내어준 한 잔에 한결 가볍고 시원해진 여름밤. 내슈빌도 아니고 주한 미국이 떠난 이태원에서 웬 컨트리음악을 흥얼거리며. LOCATION 그랜드올오프리
밤의 수다
이태원 몇 블록을 건너 DJ 넷갈라의 작업실로 향했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 “눈치를 좀 채셨겠지만 제가 되게 주저리주저리 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밤의 기류를 따른 탓일지, 대화의 종착지는 여름도 밤도 아닌 이태원에 닿아 있었다. “지금 한창 하고 있는 작업을 조금 설명하자면, 이태원에 대한 러브 레터예요. 여기 되게 엉뚱한 곳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서울에서 가장 부자 동네랑 가장 지저분한 동네가 같이 공존하는 동네잖아요. 지난 시간 동안 무척 많은 문화가 생겨났는데 정작 그런 문화의 발생에 대한 크레딧은 제대로 챙기지 못한 느낌이에요.” 말을 잇다 스스로 ‘이태원의 대변인’ 같다며 웃어 보이는 그에게서 어찌 날카롭고 거친 전자음악이 탄생하는 걸까. “원래는 발라드 앨범을 만들고 싶었어요. 한국 발라드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되게 정서적인 유착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감성적인 음악을 만든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음악의 지형이라든지 지향점이라든지 대중이, 예술이, … 각설하고, 거대한 비전에 대한 웅변과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에 대한 토론이 아닌 그와 그저 작고 하찮은 수다를 나누니 좀 알겠던 것, 삶의 진실이 잠깐 여기 와 있었구나, 싶었던 것. 넷갈라(뮤지션, DJ)
여름밤 노랫말
말하듯 중얼중얼 여름을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 전진희의 노랫말이 된 이야기들. “여름을 막 지날 때는 얼른 끝났으면 좋겠는데 막상 끝나면 왜 이렇게 허전하고 슬픈지 몰라요.” “돌이켜 보면 여름이 가장 타오르고 살아있는 느낌. 벌레조차도요. 같은 이파리여도 여름의 이파리가 더 무성하고 생생하잖아요. 제가 그런 걸 만끽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어서 괜히 여름을 노래하게 된 것 같더라고요.” “언젠가 여름 밤에, 여름에 대한 곡을 쓰는데 쓰다 보니 끌어 오르는 감정이 있는 거예요. 밤에는 감각이 좀 더 깨어나잖아요. 그런 느낌을 더 살리고 싶어서 편곡을 맡기고, 편곡된 버전을 들었는데 그제야 알겠던 건, 내가 그리고 싶었던 여름의 뜨거움이 이런 거였구나.” “전 오토바이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데 오토바이를 타고서 그냥 막 어디론가 달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게 그렇게 울컥 하더라고요.” 전진희(싱어송라이터)
둥그런 밤
조각가 배현우는 밤을 좋아하고 구를 조각한다. 중력 때문에 지구 안에서는 완벽한 구가 없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새로 안 사실. “어차피 있을 수 없는 ‘구’에 조금 끌렸다”는 작가는 지금껏 도합 100개 가까운, 구 아닌 구를 깎아왔다. 조각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시멘트와 같은 재료를 조금씩 조금씩 쌓아 올리거나, 돌 혹은 나무를 깎아내는 식으로 이뤄진다. 작가는 깎는 쪽을 선호한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계속 구를 깎는 일이 ‘각’을 없애는 일 같거든요. 그런 느낌이 좋아요.” 구는 완벽할 수 없지만 작가는 그날 그날 스스로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구를 만든다. 완성한 일자를 작품명으로 삼는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다. “가장 완벽한 구요? 차라리 없어서 계속하는 것 같아요. 그게 있다는 순간 그만하려나. 그건 잘 모르겠어요.” 종종 산책하러 온다는 중랑천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이날 밤 보름달을 보았나. “보름달 좋아해요. 그런데 우주에서는 태양이 제일 구에 가깝다고 하더라고요. 우스개 소리로 그런 말 해요. 먼 미래엔 우주에 가서 깎아보고 싶다. 하하하.” 배현우(조각가)
서울 바닷가 사람
“여름은 어떤 계절이에요?” 노량진수산물도매시장 한복판에서 묻기에 적절한 질문인지는 그다음 생각했다. 상대는 경매사 강정욱. 패션 매거진에서 나왔다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찬찬히,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저희는 이제 바닷가 산지에서 보내주신 물건이 서울 여기저기에 모두 유통될 수 있게 분산 역할을 합니다. 제가 경매하는 건 낙지랑 그리고 홍합, 그런 종류. 이쪽 경매장은 어패류 경매장이에요. 새벽에 일한 지는 10년쯤 됐습니다. 밤 12시쯤부터 저희는 경매를 하니까요.” 이곳에서의 여름은 따지고 보면 비수기의 계절. 그의 표현대로 ‘파는 맛’이 생기는 계절은 되려 겨울이다. 일은 그때가 더 재밌다고 한다. “지금은 어패류가 점점 들어가는 추세고, 여름엔 민어나 갑오징어가 막 나와요. 그런데 경상도시죠?” 경남 통영이 고향이라고 밝힌 그가 낚아채듯 내게 던진 질문. 얼떨결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에 대해 말하다, 문득 노량진에서 남쪽 바다의 낯익은 비린내를 맡았었던지. 벌써 아릿하다. LOCATION 노량진수산물도매시장 경매사)
멍청하고 축축하고 풋풋한 여름
컬러리스트 염지윤의 작업실은 낮밤 상관없이 검정으로 가득 차 있다. 대신 그의 모니터 속은 그 어떤 세상보다 온 세상의 색들의 집약되어 있는 곳. 그 색들의 이름을 나열하자면 아마 이런 것들. 멍청한, 축축한, 풋풋한, 찐득찐득한… 이렇듯 컬러리스트는 다소 추상적인 색 표현들을 해석해 내고, 구현하는 직업이다. 그렇담 밤의 색은 어때요? 물었다. “밤도 단계가 있잖아요. 7시부터 12시까지 단계가 있는데, 12시 때 암暗으로 제일 떨어지니까 더 깊은 블루로 들어가죠. 요즘같이 더워질 기미가 보이면 밤은 더 찐득찐득해지고, 색도 깊어져요. 봄과 가을같이 밤이 얇진 않구요.”
그는 최근 두 갈래의 여름을 작업했다. 뉴진스의 과 에스파의 . “10대와 20대의 여름이요. 같은 여름이라도 이렇게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여름은 결코 한 가지가 아닌 거죠.” 그의 이야기를 가만 듣다 ‘하물며 여름도’ 싶어 그만, 1년을 사계절이라 부르는 일이 흡사 ‘퉁 치는’ 얼마나 게으른 일인지 알았다. 염지윤(비디오 컬러리스트)
Text Kwon Sohee
Photography Lee Yunkyun
Art Lee Sangh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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