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은 화장품이 아니다
사선으로 한강진교회를 둔 이태원로 초입. 새 스토어가 들어섰다. 이솝의 미색으로 곱게 덮은 스투코 벽과 옻빛 몰딩, 거울 같은 통창에 드리운 가로수를 마주하고 서면 이윽고 초연해진다. 모든 이솝 스토어의 외창엔 마음을 두드리는 문장들이 우연을 가장해 우리를 만난다. 새로운 한남 스토어도 예외가 아니다. 매장 밖을 거닐던 우리는 무심코 지나칠 뻔했던 누군가의 사유를 만나고 이내 풍요로운 마음이 된다. “To exist is to change, to change is to mature, to mature is to go on creating oneself endlessly”. 존재는 곧 변화. 변화는 곧 성숙. 성숙이란 결국 나라는 존재의 끊임없는 창조에 다름 아니라는 프랑스 철학자 앙리루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son의 말. 사탕을 숨겨뒀다는 할머니의 반닫이를 여는 마음이 되어 안으로 들어섰다.
한옥이던 기존 구조를 유지한 내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 위로 희고 아름다운 카오스가 펼쳐진다. 가감 없이 노출한 들보와 서까래의 레이어가 단일한 미색으로 덮여 시간의 켜 속으로 초대한다. 고개를 내리면 군데군데 도시를 닮은 요소가 중용의 미를 말한다. 차갑지만 따뜻한 질감의 황동 선반 위로 이솝의 시각언어, ‘반복’과 ‘정렬’이 이어진다. 미색의 라벨과 짙은 호박 빛깔의 보틀, 그리고 이솝이 오피셜 폰트로 채택한 옵티마Optima체의 조형성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늘어서서 만들어내는 정갈한 시각성은 차라리 비주얼 트랜퀼라이저Visual Tranquilizer.
그 사이로는 역시 황동으로 제작된 프래그런스 아르무아Fragrance Armoire가 있다. 강남의 이솝 파르나스 스토어에서 처음으로 소개, 이번 한남 매장에서 두번째로 선보이는 이솝의 아름다운 서랍장을 통해 기존 향은 물론 최근에 선보인 아더토피아 3종까지, 깊고 풍성해진 모든 이솝의 프래그런스 레인지를 한눈에, 그리고 한 코에(!) 감각할 수 있다. 프래그런스 아르무아의 나뉜 서랍 속엔 각기 다른 이솝의 아로마를 입은 ‘세라믹 디스크Ceramic Disk’ 가 들어있다. 시향을 원하는 고객은 언제든 디스크를 꺼내 얼굴 곁으로 끌어당기기만 하면 된다. 그게 아니었다면 테스트용 스트립에 뿌려 주머니에 잡동사니를 만들고 결국엔 버려졌을 번거로운 시간을 완전히 생략할 수 있는 것. 높다란 아르무아의 여닫이문이 닫혔을 땐 브라스의 은은한 금빛을 품은 거대한 단일 오브제가 되어 공간에 존재감을 더하기도 한다.
국내 스토어에서는 최초로 응용된 레진resin 소재의 싱크 및 카운터의 매끈한 촉각은 머리 위로 얼기설기 드리운 노수老樹의 임의성과 완벽에 가까운 콘트라스트를 이루며 전에 없던 공감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입구에 들어 서면 마주하는 레진 싱크에서는 스킨케어, 헤어 케어 그리고 보디 케어 제품을 컨설팅받을 수 있다. 피부를 넘어 바르고 뿌리는 행위, 일상의 리추얼에 대해 더욱 진중한 이야기를 나누기 원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한남 스토어에 상주하는 이솝의 컨설턴트를 찾자. 그는 당신의 발걸음을 더해 낮은 단을 넘어 스토어 안쪽에 마련된 ‘프라이빗 싱크’ 로 안내할 터다. 벽 한 면을 온전히 옻칠 목재 캐비닛과 싱크 유닛으로 제작한 프라이빗 싱크는 국내 매장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섹션으로, 상세한 컨설팅이 필요한 이솝의 고객과 컨설턴트 모두를 배려해 탄생한 공간.
공간 양옆을 감싸 안은 지속 가능한 가든은 공간의 사계를 싱그럽게 유지한다. 국내 스토어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이솝의 정원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드나드는 바람길은 물론 시선과 발걸음의 움직임까지 고려해 아담한 휴먼스케일로 완성했다. 나지막한 처마 너머로 청송이 내다보이는 한쪽 정원에선 사계절 내내 볼 수 있는 찔레나무가, 진입로인 이태원로와 맞닿은 정원에선 베리류와 식용식물이 자란다. 그리고 어쩐지 툭 걸터앉아 책장을 넘길 여유도 있다. 정원 속 작은 도서관에서는 이솝의 오랜 벗 를 비롯해 이솝이 엄선한 책을 만날 수 있다.
Interview with
Marianne Lardieux마리안 라르디외 | 이솝 글로벌 스토어 디자인 헤드
&
마르솔리에 빌라코르타Marsollier Villacorta LLC | 이솝 한남 스토어를 구현한 건축 디자인 스튜디오
마리안 라르디외Marianne Lardieux
소개를 부탁한다.
마리안 라르디외, 프랑스 건축가다. 건축 사무소와 루이 비통, 셀린느 등 유수의 럭셔리 패션 브랜드를 거쳐 2016년 이솝에 미국 스토어 디자인 매니저로 합류하며 뉴욕에 왔다. 그곳에서 미주 지역 스토어 디자인 팀을 새롭게 구성하고, 고객 경험과 지속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브랜드 포트폴리오가 빠르게 확장될 수 있도록 관리했다. 2020년 9월부터는 글로벌 스토어 디자인 총괄을 맡고 있다. 현재 남편, 아들과 함께 파리에 살고 있다.
이솝의 모든 공간은 고유의 개성과 색깔을 지닌다. 각 공간의 테마와 이야기는 어떻게 도출되고 또 결정되는지 궁금하다.
디자인 행위를 솔루션으로 봤을 때 우리는 ‘진심’을 추구한다. 너무 빤하거나 상상력이 결여된 모든 것을 지양한다. 감각을 풍성하게 자극하고 심신의 균형과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다. 어떤 스토어에서도 가능하다면 기존 공간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가치 있는 것은 남겨 그 가치가 돋보이도록 한다. 더불어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지역사회를 지원하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로컬 구성원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건축적으로 보자면 우리 디자인은 매장이 탄생하는 지역이 지닌 고유의 맥락과 이어지도록 한다. 또 그 지역의 특성을 해치지 않고도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창조하고자 한다. 주변 경관과 기존 파사드를 유지하고 보완하려 노력하며, 이솝의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일관된 디자인 언어를 공간에 녹여낸다. 어쩌면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일련의 결정, 그리고 이솝이 적용하는 섬세한 잣대와 기준은 우리 공간이 매혹적이면서도 편안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작은 디테일과 개별 요소가 모여 통합과 조화를 이룬다. 마치 잘 정돈된 옷장처럼. 이솝의 공간은 고객에게 끊임없이 특별한 경험을 전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 공간을 설계한다는 것은 이솝의 제품을 패키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만큼 공간은 우리의 확고한 사유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모두에게 대체 불가한 경험으로 승화된다. 우리의 귀한 고객에게는 물론, 고객에게 특별한 순간을 선사할 이솝의 지적이고 상냥한 컨설턴트에게도 말이다.
새 한남 스토어를 디자인하는 데 한국의 다양한 전통 요소를 연구한 것이 흥미롭다. 63스퀘어의 금빛 파사드와 사랑방 그리고 전통 가구 반닫이 등. 이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달라.
건축가 듀오 마르솔리에 빌라코르타 LLC가 이번 한남 스토어 프로젝트에서 활약했다. 이들은 서울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 황혼이 드리운 이 도시의 경관에서 영감을 받았다. 저무는 해가 분주한 메트로폴리스의 전경을 금빛으로 씻어 내리는 풍경은 시간의 흐름을 얼마간 더디게 했고, 이 말간 빛은 서울에 축적된 과거와 현재의 켜를 균질하게 만들었다. 한남 스토어 프로젝트는 해가 저무는 찰나의 서울을 포착해 추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63스퀘어의 금빛 파사드가 상징하는 서울의 근대화를 생각하기도, 강렬한 석양이 품은 한국의 유구한 역사적 잔상을 바라보기도 했다. 서울 도심엔 전통 주거 양식이 현대의 그것과 공존하며 모던 지형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풍요롭고 친밀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새로 생긴 이솝 한남 스토어에는 전통 한옥의 건축양식이 반영돼 있으며, 미묘한 디테일에는 한국의 전통 서랍장인 나무 궤에 대한 조사도 반영됐다. 풍성하게 옻칠을 한 목제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복잡다단한 금속 하드웨어와 대비를 이루며, 매장 내부의 정교한 하드웨어는 기능적이면서도 오브제 역할을 수행하도록 배치했다.
새로 오픈한 한남 스토어를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한다면.
전 세계의 모든 이솝 스토어가 그러하듯 한남 스토어 고유의 ‘독자성unique’. 한국이라는 나라,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비롯된 영감과 현지에서 공수한 건축 자재와 정원의 식생을 아우르는 ‘지역성domestic’. 그리고 공간이 지어지는 지역의 맥락과 기존 건축물, 거기서 비롯되는 경험의 연장선이라는 측면에서 ‘건축architectural’을 꼽겠다.
마르솔리에 빌라코르타Marsollier Villacorta LLC (좌 : Wallo Villacorta, 우: Cyril Marsollier)
“평이한 재료로 마치 강박처럼 정교한 디테일을 만들어낸다”는 모 매체의 마르솔리에 빌라코르타에 대한 평이 인상 깊다. 당신의 건축적 지향점이라면.
우리 작업은 늘 ‘실용성’에서 출발한다. 클라이언트의 기능적 요구, 예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디자인적 맥락’ 이다. 일단 프로젝트의 토대가 완성되면 공간을 통해 사용자에게 세심하고 아름다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폐기물을 줄이고, 설계 요소나 디자인이 과하지 않도록 신경 쓰는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면서 말이다. 기존 구조에 우리의 터치를 가미하는 경우엔 필요한 부분에만 레이어를 덧입히는 것, 기존 환경을 최대한 침해하지 않고 공간의 심미성을 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뉴욕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이미 세계 곳곳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당신이 바라본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해, 그리고 한남동이라는 입지에 대해 들려달라.
도시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모든 프로젝트에서 필수적이다. 팬데믹으로 인한 수많은 제약은 상황을 유동적으로 유지해주지 못했다. 따라서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현지 팀에 의존해 그들이 우리의 감각을 서울, 한남 일대로 확장하는 역할을 수행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현장으로 디지털 여행을 떠나 원격으로 분위기를 간접 경험했다. 구글 스트리트 뷰를 통해 거리를 거닐고, 한남동의 역사를 공부하는 등 꽤 많은 시간을 쏟았다.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이태원의 거리 풍경은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킨 요소 중 하나였다. 매년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것 같더라. 얼른 팬데믹 상황이 나아져 서울에 방문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최근 당신이 진행한 미국 버지니아주 타이슨의 새 이솝 스토어 내부를 구경했다. 질감이 다른 화강암의 조화가 정말 아름답더라. 한남 스토어에 주로 응용한 자재와 질감에 관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
한남 스토어가 들어선 건물은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며 많은 변화와 증축을 거쳤다. 건물을 전체적으로 보면 무겁고 거친 목조로 이루어진 전통 한옥 양식의 건축 요소와 함께 지난 30년 동안의 현대적 증축 흔적도 발견할 수 있 었다. 한남 스토어에 사용한 자재를 통해 건물 자체의 삶과 서울의 시대성을 한데 아우르고자 했다. 한옥을 연구하며 한국 전통 목가구에 매료됐고, 풍부하게 옻칠을 한 나무 궤, 변화무쌍한 패턴의 놋쇠 서랍을 디자인했다. 건물 정면에서부터 보이는 현대적 증축의 흔적을 반영하기 위해 마치 흰 비누가 연상되는 천연 레진을 주재료로 싱크대와 카운터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상당한 시간 동안 이솝의 공간을 설계하고 또 구현해왔다. 이솝이라는 브랜드를 정의하자면.
이솝은 몰입감 넘치는 ‘경험’이다. 그들이 창조하는 우수한 제품을 뛰어넘을 만한.
Text Lee Hyunjun
Photography Courtesy of Aesop, Noh Seung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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