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Ji Woong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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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죽었다고들 하지만 망한 제국에서도 어떻게든 새로운 감독은 기어이 등장한다. 2015년 선댄스 국제영화제에서 공개한 <탠저린>은 영화 전체를 아이폰 5s로 촬영했다는 사실로 이슈가 됐다. 물론 이런 화제가 새로운 미학적 전진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한 영화는 이미 심심찮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탠저린>은 스마트폰 영화라는 별스러움에 붙여 아이폰 카메라만의 고유한 색감이나 감성과 더불어 디지털 환경이 탄생시킨 시도라는 측면에서 주목받았다고 해야 맞다.
<탠저린>은 션 베이커의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소위 소외된 인물의 삶을 비추되 고발하거나 동정하는 외부자의 관점을 품진 않는다. 타인의 삶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고 재단하지 않는 일은 션 베이커의 영화에서 무척 중요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란 1965년 플로리다에 디즈니랜드 건설을 추진하기 위한 프로젝트 이름이다. 그렇게 지은 원더랜드는 여전히 꿈과 희망을 전시하고 판매하며 성업 중이다. 션 베이커의 신작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디즈니랜드 지척에 살면서도 환상적인 꿈동산과 가장 멀리 떨어진 세계에 사는 여섯 살 소녀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친구들의 여름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본다. 무니와 친구들은 하루 38달러짜리 알록달록한 모텔에 산다. 아이들에게 모텔은 유일한 집이고 놀이터다. 젊은 엄마가 돈 벌러 나간 사이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는 건 본의 아니게 모텔 관리인 바비(윌렘 데포)다. 그는 ‘츤데레’다. 투숙객들은 그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친구에게, 가족에게 하듯 의지한다. 이 영화에서 보비는 객석의 우리고, 사회의 마지막 윤리다.
션 베이커는 전작 <탠저린>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불우한 어린이의 가난을 비추지만, 그 비극을 들추며 섣불리 개입하지 않는다. 누가 봐도 미숙하고 모자란 무니의 엄마 핼리를 한심하게 비난하거나, 변호하지 않는다. 단지 이런 엄마도 있다고 펼쳐놓을 뿐이다. 관객은 어리고 무책임해 보이는 엄마가 무니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유일한 희망임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선한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절망을 착취하는 수많은 영화가 이른바 ‘착한 영화’, ‘좋은 영화’로 둔갑해 본의든 아니든 사기로 지갑을 두둑이 채우는 현실에 션 베이커의 사려 깊음은 무심하지만 가장 세련된 상태로 뜨겁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인물은 무니 역을 연기한 브루클린 프린스다. 아이가 아이 같지 않을 때, 필요 이상으로 어른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일이 능숙할 때 나는 무섭고 불편하다. 아니, 아이의 모습을 잃은 그 아이가 서글프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무니 어린이가 그렇다. 영화 초반쯤 무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는 어른들이 언제 울지 맞힐 수 있어. 울기 직전의 표정이 있거든” 하고 말할 때 나는 이 아이를 마냥 사랑할 수 없을 거라 단정했다. 내내 관객에게 무니의 세상을 소개하던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마지막, 그제야 무니는 순한 아이의 얼굴로 엉엉 운다. 더 이상 사랑스러울 수 없게 펑펑 눈물을 쏟는다. 그리고 마치 태어나 단 한 번도 힘껏 달린 적 없는 것처럼 달려 나간다. 그것이 질주인지, 도약인지, 아니면 도망인지 알 수 없지만 달리기가 끝나면 무니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가망 없는 세계에서 희망을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겠느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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